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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일 년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사도11,26)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고 다닌 시간은 몇십년이 아닙니다. 고작 공동체별로 몇 년, 더 짧게는 몇개월, 심지어는 며칠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화되었지요.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시간을 본당 활동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잔치가 되고 말지요. 우리끼리의 행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늘 모인 사람들이 또 모여서 매년 하던 일을 반복하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들이 말씀을 접할 기회를 찾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사제는 사제대로 힘이 빠져 있고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힘이 빠져 있습니다. 사제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을 앞에 둔 채로 마치 중소기업 사장처럼 되어가는 중이고 신자들은 의무의 굴레를 쓰고는 별다른 기쁨 없이 일상적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수도자들은 교회 안에 성령의 힘을 불러오기 위해서 진심으로 스스로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자신들 수도 공동체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고심하고 내부적인 소소하고 일상적 갈등으로 기력을 다 빼는 중입니다.

고작 일년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이끄는 사도들과 수년 동안 같은 본당에 머무르면서 별다른 열매 없이 현상유지에만 만족하는 우리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여기서도 늘 하던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믿음이 강하고 우리는 지금 왜 이런 현상에 시달리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나아가 부활하신 그분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상급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그 믿음의 체험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지요. 우리는 주님을 본 적도 없고, 환시로도 뵌 적이 없으며, 그래서 부활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은 부활의 그 시대로부터 단순히 시기적으로가 아니라 열성적인 면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어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외적인 형식 뿐인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이 어떻게든 기계는 돌아가는 형국인 셈이지요.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성령’이 함께 계시고 그분의 힘을 믿는 수많은 이들이 성령으로부터 힘과 기력을 얻어 사도들에 버금가는 복음 선포 행위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체 안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면서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각 사람의 내면에 머무르면서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상의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열정의 10분의 1만 쏟아도 우리는 적지 않은 영혼들을 하느님 앞에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일 년, 그리고 우리의 일 년...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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