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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복수법의 위험

타인을 고통을 보면서 즐긴다는 행위는 참으로 사악한 행동입니다. 남이 고통받는 것을 자신의 낙으로 삼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안에서 알게 모르게 그러한 일을 즐기곤 합니다.

너는 나쁜 짓을 하였으니 그대로 당해봐야 한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잔혹한 살인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잔인한 죽음을 제공해야 하고, 국민에게 고통을 끼친 정치인은 잘근잘근 씹어 삼켜야 성이 풀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충분히 고통을 당했으니 너도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 즉 동태복수법을 굳게 믿는 이들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요.

이 생각의 위험성은 바로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해서 장님이 되어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의 행위를 극대화시켜 나의 그릇됨을 가리는 것이 첫번째 오류이고, 나아가 우리를 지상에서 가장 분별력이 뛰어난 자로 착각한다는 것이 두번째 오류입니다. 마치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일련의 세계가 존재하는 세상의 전부인 양 생각을 하고, 그러한 좁은 시선을 바탕으로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가장 바르고 옳은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계속해서 나쁜 행위를 이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당한 방어행위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에게 동일한 잔혹한 행위를 할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어두운 생각을 즐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단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의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적용시키곤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기가 그렇게나 힘든 것이지요.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느낀 대로, 내가 받은 대로 너도 당해봐’라는 생각은 언뜻 참으로 ‘정당한’ 생각 같아 보이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억울함은 증폭된다는 것이지요. 두 꼬마 아이가 싸울때에 한 대를 맞은 꼬마 아이는 다시 한 대를 돌려준다고 화가 풀리지 않습니다. 감정은 이미 증폭되어 있는 상태고 맞은 아이는 때린 아이에게 몇배를 돌려 주어도 성이 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른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향해서 온갖 독설을 주고 받으면서 증오와 악은 더욱 더 커져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장님들이 많습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지요.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심판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생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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