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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기 전에 예방하기

망쳐버리기 전에 예방하십시오. 모든 일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특히 영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들, 남들을 헐뜯기 위해서 공을 들이는 사람들, 보다 소중한 것을 보살필 줄 모르고 세상 사정에만 신경쓰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망쳐 버리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부부의 예를 들어볼까요? 아내들은 자신을 향한 남편의 사랑이 모조리 식어버린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마치 남편이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가꾸고 보살필 줄을 모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 헛된 명예심 때문에 자기 스스로 더욱 공허하게 되어가고 남편을 존중할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무시하고 쉽게 생각하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는 못하고 나중에는 매일같이 남편 욕을 하는 아주 못된 여편네로 돌변해 버리고 말지요. 그러고서도 모든 잘못이 남편에게 있다고 투덜댑니다. 행여라도 남편이 외도라도 하는 날에는 아주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남자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 깨어진 것은 예전 상태로 복구하기 굉장히 힘이 듭니다. 어렵사리 갈라진 부분을 꿰어 붙이더라도 그 붙인 흔적이 남아있게 되지요. 그래서 예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이 시작되기 전에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이를 위한 것이건만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리고 나서야 뒤늦게 해결 방안을 찾지요. 참으로 어리석고도 장님들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저로서는 답답함이 극에 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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