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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최고의 방법입니다.

금속 탐지기를 지닌 채로 바닷가를 탐사하면서 걸으면 많은 숨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의 일이 사람들에게도 일어납니다. 마냥 평온하고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금속 탐지기’와 같은 분별력을 발동하면 그 안에 숨어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 이 사람이 대화하는 주제가 무엇이며 그 이야기를 왜 꺼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세속적인 관심사에 파고들어있는 마음과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그 반대편으로 보석과 같은 이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고요 속에 머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가치들을 즐기는 이들이지요. 대부분 말수가 적고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며 절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음, 마지막 부류도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요. 거룩한 척 악한 의도로 가득한 위선자 집단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이들 사이에서 그들의 마음을 앗아 가기 위해서 애쓰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속 깊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스스로를 엄청 거룩한 사람으로 드러냅니다. 흔히 기도를 ‘많이’ 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열성이 있기보다는 그렇게 기도한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 받으려는 깊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렇게 의로움을 인정받고 나면 주변 사람들을 후리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류들입니다. 이들은 순진한 이들을 찾아서 지구 끝까지 헤메다가 하나를 찾으면 자기들보다 더 지독한 세속의 자녀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정말 무서운 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들을 분간하기 힘이 듭니다. 이들은 그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만한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니까요.

그럼 당장 저에게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속아 넘어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 걸까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한 방법이 바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꾸준함’, ‘인내’, ‘겸손’과 같은 것들이지요. 변덕스럽게 이리 저리 몰려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이들은 그런 변덕 속에서 이미 유혹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지요. 기초부터 다지십시오. 첫 마음을 떠올리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의 전부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과연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말이지요.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이웃을 저버리는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 근본에 있는 사랑의 방향을 늘 점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속아 넘어가거나 엇나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텔레비전 광고도 봐야 하고, 또 성경도 보고 싶어하니... 이미 문제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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