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그 즉시 구하고야 맙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마시는 것을 미루지 않고, 화장실이 급한 사람이 나중에 한다고 제쳐 두지도 않지요. 우리는 그렇게 육의 욕구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영적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영혼이 둔감해져 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잦은 쾌락에 젖기 시작하면 둔감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강한 자극을 매일 같이 가하면 감각 기관이 둔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탄산 음료를 매일 같이 마시면 음식에 들어간 미묘한 양의 설탕을 분별해 내지 못하는 것과도 같고, 술을 매일 마시면 알콜 기운이 약간 들어있는 음료를 마셔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신자가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채널을 만나지 못한 탓입니다. 하느님을 막연히 하늘 위의 할아버지, 감시자, 심판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수준이지요. 그래서 법에 크게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만 어기고 나면 ‘두려워 하는 대상’으로 다가오지요. 그래서 그렇게 주일미사를 빠지고 성사를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엉뚱한 친구나 엉뚱한 활동을 자주 하는 것도 이유가 됩니다. 진지한 마음이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해서 더욱 다가가 진보하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불러대니 거기에 시간을 모조리 빼앗기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친구라 해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의 위치를 빼앗는 일과 친구라면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 것을 지니고도 자신은 열심한 신자였다고 착각하고 그런데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지 못한 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노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성당에 붙어 살고, 아니면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를 갖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작은 병에 가두는 행위이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건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 바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함께 하시고, 식사 자리에도 함께 하시고, 여가 생활을 즐기는 중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된 어딘가에서 찾는다고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피정’행위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을 최고로 치고 나머지 일상의 행위에서는 하느님을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둔감해져 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잦은 쾌락에 젖기 시작하면 둔감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강한 자극을 매일 같이 가하면 감각 기관이 둔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탄산 음료를 매일 같이 마시면 음식에 들어간 미묘한 양의 설탕을 분별해 내지 못하는 것과도 같고, 술을 매일 마시면 알콜 기운이 약간 들어있는 음료를 마셔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신자가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채널을 만나지 못한 탓입니다. 하느님을 막연히 하늘 위의 할아버지, 감시자, 심판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수준이지요. 그래서 법에 크게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만 어기고 나면 ‘두려워 하는 대상’으로 다가오지요. 그래서 그렇게 주일미사를 빠지고 성사를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엉뚱한 친구나 엉뚱한 활동을 자주 하는 것도 이유가 됩니다. 진지한 마음이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해서 더욱 다가가 진보하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불러대니 거기에 시간을 모조리 빼앗기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친구라 해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의 위치를 빼앗는 일과 친구라면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 것을 지니고도 자신은 열심한 신자였다고 착각하고 그런데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지 못한 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노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성당에 붙어 살고, 아니면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를 갖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작은 병에 가두는 행위이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건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 바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함께 하시고, 식사 자리에도 함께 하시고, 여가 생활을 즐기는 중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된 어딘가에서 찾는다고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피정’행위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을 최고로 치고 나머지 일상의 행위에서는 하느님을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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