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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4)

우리는 우리의 목자를 압니다. 목자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인지하고 그분이 하는 일을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교리상식은 악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악마도 예수님만 보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여!’라고 고함지르고 다닌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어느 양이 자신의 목자가 부르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양은 그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셈이고 그 목자를 전혀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는데도 많은 경우에 모르는 척을 합니다. 헌데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일이 너무너무 바빠서 잠시도 성당에 나와 하느님을 찬미할 여유가 없는 사람, 텔레비전을 볼 시간은 있지만 기도에 마음을 쏟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이 하는 취미 활동에는 온갖 열성을 다하면서도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봉사활동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 회식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면서 청소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이들, 자신을 위해서는 수십만원을 거침없이 쓰면서 길에서 걸인을 만나면 천원 한 장에 바들바들 떠는 이들... 그들은 자신의 목자의 목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목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요.

우리 주님은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에 작은 돌부리가 있다고, 가시밭길이라고, 오르막이라고 해서 그리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쉽고 편한 길로 이끌려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더 신뢰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그분이 이끄시는 풀밭으로 갈 준비가 된 걸까요? 우리는 그분의 양떼인 것일까요?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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