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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아침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12)

영성생활에 나아가다보면 쉽게 할 수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육신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학대’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 육신의 것들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만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추스러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이고 정신이지요. 육신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소중한 것입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보살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술’을 즐기면서 몸을 서서히 망쳐 갑니다. 이미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가는데도 ‘신앙적인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하면서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몸이 무너져내리고 덜컥 큰 병에라도 걸리고 나면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지요. 크게 잘못 생각한 셈입니다. 이웃과의 만남이 중요한 만큼 하느님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뭐든 끊어 버리는 것은 오히려 속편할 수 있습니다. 보다 힘든 것은 ‘절제’하는 것입니다. 아예 접하지 않으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다 고도의 훈련을 요하는 것은 ‘적당량’을 취하면서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성인들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서술하는 성인의 삶을 스스로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분들의 외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미화시키는 데에 바빴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하느님이 우리의 육신의 고통을 즐기시는 이상한 분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은 수난과 고통에 동참한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단순히 그분의 육신의 고통을 의미없이 받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의를 사랑으로 맞서다보면 저절로 얻게 되는 시련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시련과 고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인내와 겸손을 통해서 자신을 훈련시켜 나아간 이에게 주어지는 단단한 음식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명예욕, 즉 ‘아, 내가 이렇게 열심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라고 허영심에 들뜬 이들이 남들이 할 수 없을 만한 극기의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것을 두고 신앙생활의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팔을 들고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으며, 무릎을 꿇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으며, 묵주를 몇백단을 바칠 수 있는지를 서로 경쟁하듯 자랑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내실이 하나도 없지요.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느님으로 인해서 수난받는 이는 자신이 당하는 수난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굶어라. 참아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손수 아침을 준비해 주신 분이십니다. 육신을 올바르게 보존하는 것과 친교의 식사를 참으로 소중히 여긴 것이지요. 우리는 책임감 있게 우리의 몸을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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