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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있는 신앙

역사 안에서 이미 나타난 오류들입니다.

1) 예수의 신성만 강조하기
육과 영을 완전히 분리해서 육이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으니 마구 다루어도 되고 인간은 오직 영적인 체험, 신비적인 체험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부류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나치게 영성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어긋날 수 있는 부분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절제와 책임감과 더불어 보살피는 것보다 아예 관심을 끊는 게 더 편하기 때문에 이들은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강조하면서 어긋난 길을 걸어갔습니다.

2) 예수의 인성만 강조하기
신비적인 모든 요소를 부정하고 예수의 역사적인 면모만을 받아들이겠다고 우겨대는 부류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이성의 굴레’ 안으로 집어 넣으려 합니다. 그리고 흔히 ‘인본주의’를 표방하며 인간을 위해서 실제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교회의 교계제도와 모든 신비적 활동들을 ‘형식적’이라고 비난을 일삼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컨대 미사 안에서도 형제 간의 친교만을 강조할 뿐 실제의 예수님의 몸과 피가 축성된다는 것은 부정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인간을 향한 사랑은 전혀 균형잡히지 않은 사랑입니다. 흔히 계급을 나누고 그 둘이서 서로 증오하여 다투게 만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공존했습니다. 그리고 조화로이 머물렀습니다. 우선순위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영은 마땅히 육보다 소중한 것이었지요. 그렇다고 영이 육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들의 영을 돌보기 위해서 휴식을 쪼개서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제자들과 함께 쉬러 가실 줄도 아셨고 적당히 음식을 취할 줄도 아셨습니다. 육을 혹사시킨 적은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수난에서는 인간들의 죄가 그분을 무너뜨려버렸지요. 십자가 상에서 처참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은 ‘새로운 육신’을 입게 되었고 그분은 되살아나서 제자들의 음식을 챙겨 주시고 빵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셨습니다.

균형감각을 회복하십시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오류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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