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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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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정

가정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전통적인 가정상은 점점 사라지고 핵가족이 대중화 되었으며 나아가 한부모 가정도 이제는 흔하게 관찰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형태의 가정이라도 중요한 영역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들의 내면, 영적인 영역에 가정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이 아무리 외적으로 튼튼해 보여도 결국 서로 다투고 증오하고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돈은 언제나 탐욕과 연계되어 있고 나아가 교만과 이기성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에는 다른 법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선이 됩니다. 그래서 자식도 이익이 되면 낙태를 해도 상관이 없고 부모도 이익이 되면 내버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돈을 기반으로 움직이게 되고 가족 구성원은 한 지붕에 살더라도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가정은 '신앙'이라는 중심 가치로 뭉쳐 있는 가정입니다. 이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이라는 참된 아버지를 알려 주고 그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차근차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2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가정 안에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가 존재하고 사랑이 지배하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드리는 가정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이것이 신앙 안에서 형성된 가정입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가정도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죄를 상쇄하다

우리는 한편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다른 한 편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합니다. 이 둘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야 행복해 질 수 있으니까요. 죄는 단순히 규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주일미사를 빠졌다고 무조건 죄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근본에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죄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사를 나오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죄가 형성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죄에 따른 결과로 나중에는 미사에서 멀어지게 되겠지요. 따라서 죄는 보다 내면의 심오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보다 내가 욕구하는 것을 앞세울 때에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가 그런 죄에서 용서받고 또 죄를 상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에 대한 공경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우리가 부모님을 올바로 섬겨야 마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노화를 겪으면서 서서히 약해지고 부족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 나아가 부모님의 세대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은 원래 내리사랑입니다. 우리는 자녀들과 아이들을 이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방향을 바꾸어 위로 향하는 사랑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상쇄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단, 예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한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외적인 경우에 부모님이 나를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길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그때는 우리는 사도들이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린 것처럼 인정에서 해방될 필요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빌라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 하려는 이의 특징을 보입니다. 그는 진리를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눈 앞에 일이 성가시고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목적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상대를 심문하고 몰아갑니다. 반면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언제나 솔직한 상대의 생각을 묻고 당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말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내면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그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이미 그릇된 일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애써 숨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끌려왔지만 당당합니다. 당신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당신이 뜻하는 바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짓은 언제나 왕성히 활동하고 자신의 중심생각 없이 주변에서 흘러들어온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반면 진리는 언제나 묵묵히 자신을 드러낼 뿐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영원의 진리

왜 우리는 2000여년 전에 죽은 한 인물 때문에 이러고 있을까요? 그분의 존재가치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여지껏 그분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는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한때의 흥분상태일 뿐인 것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초를 가만히 살펴보면 제일 위와 아래에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바로 희랍어로 알파와 오메가라는 글자입니다. 이는 희랍어가 시작되는 단어이자 마지막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에도 또 앞으로도 오실 분이시고 그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같은 진리를 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진리를 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본 구도로 되어 있는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에 동참하는 이는 그분의 힘을 통해서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 이는 나 자신의 생존만을 염려하고 내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진리와 선을 위해서 기꺼이 수난을 끌어안고 스스로의 목숨을 하느님을 위해서 미워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부활하고 나아가 상급을 받고 다스리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만했고 저마다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이 말씀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영원한 권력

이 땅에서는 원하면 하느님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원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러한 행동은 지상의 재판대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고 그분의 외아드님을 해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행위들은 합당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권력'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권력 속에서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망각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참된 통치'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선이 항상 이긴다'라고 표현하면 조금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니까요. 다니엘 예언서는 바로 그러한 통치, 즉 하느님의 통치를 예언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통치, 우리는 그 통치권의 수장에게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헛된 권력에 속지 마십시오. 그 어떤 막강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 들에 핀 풀꽃처럼 오늘은 생생해 보이지만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시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의 참된 위엄과 권능 앞에 복종할 줄 아십시오.

평화를 알아볼 눈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금전적 이득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음껏 돈을 걱정없이 쓸 수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평화는 '존재'할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평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도대체 얼마나 돈을 써야 만족할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오감이 만족스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참된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평화가 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이들은 실제 예수님이 바로 곁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평화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평화인지 모르는데 그 곁에 평화가 지나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좋은 포도주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차라리 막걸리나 한 병 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평화를 알아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제 아무리 평화의 가르침을 전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은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진 것처럼 그것을 물어뜯고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말하는 깨어있는 종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준비된 태도를 가지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쏜살같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 줍니다. 그들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야욕과 탐욕,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낱같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싶은 욕구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오직 주인의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