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루카 4,28) 예수님은 고향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적’ 차원으로만 보려 했지요. 즉 예전의 어린아이로만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교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고향 마을에서 놀던 어린아이로 간주하고 싶었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난 사람이라는 특권을 어떻게든 누리려고만 했을 뿐, 자신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요. 인간의 교만은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좋은 것들을 가로막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별다른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기득권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이 구원을 보장한다.’ 이것이 핵심이었지요. 즉, 고향 사람이라는 관계가 하느님을 아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이끌어간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만일에 같은 가르침을 가톨릭 신자들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예수님이 지금의 시대에 같은 가르침을 전해야 했다면 아마 이런 예를 드시지 않으셨을까요?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지만 하느님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머무르지 못하셨고 오히려 팔레스티나에 사는 선한 이슬람인을 돌보시고 그와 함께 머무르셨다. 이런 표현을 듣고 진실한 내면의 봉헌을 사랑하는 이라면 기뻐하겠지만, 자신의 가톨릭 신자의 외적 신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화를 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