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어딘가에 마음이 묶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 사건, 혹은 물건이 될 수도 있지요.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묶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당하게 되고, 자유를 구속당한 사람은 불편을 느끼고 불행하게 됩니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유를 방종과 착각하면 안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아름답고 선한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우리에게 해가 되고 우리를 추악하게 만드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우리를 묶어 버리는 일들이 되고 맙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을 마음에 담고 거기에 얽매여 살아가게 되지요.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종의 상태를 해방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그러나 또다른 종류의 노예 상태가 있으니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유를 무언가에 내어주고 거기에 묶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인터넷 기사를 접하고 났을 때에 자기 스스로의 자유를 그 기사거리에 내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의 영역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데 그 기사를 읽음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자녀들은 부모의 보살핌과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고 부모들은 자녀들의 순진무구함을 즐겨야 하는데 어느 인터넷 기사가 그것을 망쳐 버리는 것이지요.
어느 사람에게 묶여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인연을 받아 묶인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서로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다른 이들을 만나 사랑하고 사귈 수 있는데 나 스스로 한 누군가를 선택해서 그가 내 사랑을 받아 주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허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벌써 수차례나 시도를 했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거기 얽매여 사는 것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얽매인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자유롭게 선택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마 저의 이 표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마음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얽매여 있는 이들의 마음은 기쁨을 누릴 순간들이 훨씬 더 적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셨고 사람은 누구나 마음껏 사랑하고 기뻐할 권리가 있습니다. 길가의 들꽃을 보고 기뻐하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보고 기뻐하며, 나를 반기는 이웃과 시간을 보낼 자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소중한 자유를 어떤 사물이나 사건, 사람에게 얽매여 허비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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