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로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확증’되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그래야 믿음이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눈 앞에 컴퓨터를 두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눈 앞에 확연히 드러나 있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만일 제가 정말 의심이 많아서 눈 앞에 컴퓨터가 실존하는지 아닌지까지 의심한다면 그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음에는 그냥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를 더해서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관계 안에서 우정이 쌓여가고 서로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줄 때에 우리는 아무에게나 빌려주지 않습니다. 관계가 형성이 되고 그의 평소 행동에서 그가 믿을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빌려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잃을 생각으로 적선해 주던가 아니면 빌려주지 않게 됩니다.
어느 아이가 필기 연습을 하는데 어느 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글을 대신 써 주면 그 아이에게 글을 쓰는 능력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글은 아이 스스로 써야 하고 그렇게 손가락의 힘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알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오늘날로 치면 사제들과 교리교사들의 가르침, 혹은 부모의 신앙 가르침 등등으로 바꾸어볼 수 있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 믿게 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방법을 써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에게는 의심하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고 올바른 것을 듣고 실천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스스로의 자기 반성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올바로 가르치고 있을까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빛을 드러내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말을 현란하게 해도 삶으로 그 가르침과 정반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전혀 배울 거리를 던져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의심의 여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가 있어야 하며, 그의 말이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기현상만 찾아서 믿음의 여지로 삼으려는 사람은 결국 언젠가는 함정에 빠져들고 엉뚱한 믿음을 따라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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