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코린 15,9-10)
바오로 사도는 은총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근원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이 하셨다고 고백을 하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이고 그 일은 자신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끊임없이 은총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외적으로 외압을 가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변화는 일시적일 뿐이고 실제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셈입니다. 사탕을 먹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먹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사탕을 뺏는다고 해서 사탕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고 뺏으면 뺏을수록 그 간절한 마음이 더 커져 버려서 결국에는 사탕을 찾게 되고 먹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사탕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사탕이 아이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으며 나중에 지나친 사탕 섭취로 비만이 되면 얼마나 불편하게 될지를 올바르게 설득할 수 있다면 아이 스스로 사탕에 대해서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총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용하고 있으며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그러한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행위에 가담한다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은총을 저버리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총의 사도였고, 자신의 내면에 흘러들어온 은총을 그대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이가 가장 먼 곳까지 교회를 전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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