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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8의 게시물 표시

공허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난다는 이 간단 명료한 사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사실이다. 죽음이 전제되고 나면 사람은 두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죽음을 끌어안고 함께 절멸해 버리던가 아니면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맞이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의 혼란스러움이 그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떼어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죽음의 모습을, 죽음의 향기를 만날 수 밖에 없다.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에서, 마주하게 되는 병자들의 모습에서, 또 죽은 친지들과 친구들에게서 인간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으면 그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고 애써 다른 대체물들로 그 빈공간을 메꾸려고 한다. 그렇게 다들 살다가 죽어간다. 흩날리는 먼지처럼 공허한 삶이다. 저마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 외쳐대려 하지만 결국 공허로 돌아가는 삶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올바로 성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공허한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이런 공허 가운데에서 희망의 속삭임을 들려준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뒤에 오히려 본질적인 생이 시작된다고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무지와 교만은 스스로를 가장 현명한 이로 생각하게 만들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고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 안에는 어둠의 영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이 공허의 세상 속에서 참된 충만함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세상에는 영원을 살아가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영원에 초대하고 계신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체험적인 지식

제가 지금껏 선교사로서 또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말씀 선포자로서 현장에서 느껴온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람들의 영적 갈증 사람들은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목마르지 않아서 아무것도 찾지 않거나 단순히 게으르고 무지해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목마름을 느끼고 갈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내어주는 손길이 부족해서 그 상태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2. 복음의 기쁨 복음에 대한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말 그대로 복되고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는 물론 받아들이는 대상자에게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이지만 먼저는 선포하는 이가 복음의 순수성과 핵심을 올바로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여러가지 가르침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의무적인 것’, ‘기피하고 싶은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쁨을 올바로 회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부족한 자각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능력이 없다고 느낍니다. 즉, 복음을 알고 전하는 데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 부류에게만 복음을 알고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알게 된 모든 이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 실천자,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각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4. 능동적인 선포 선포는 더이상 수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선포는 한 지점을 정해두고 기다리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당 안에 모여 들어야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지닌 이가 다가서는 모든 곳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다가서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복음에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가서는 시기는 이미 흘러가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빠른 속도로 발...

나는 나를 아는가?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숨어 있습니다. 물건의 가격을 묻는 사람은 그것을 사고 싶은 의향을 이미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관심도 없는데 공연히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 산란한 사람이거나 의도적으로 주제를 흐리려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대화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로는 그 사람의 중심 생각이지요. 그가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가 일상 대화 안에서 거의 드러납니다.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것을 대뜸 주제로 꺼내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의 영적 생활을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그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음식 이야기 하나로 몇시간 동안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정작 자기 자신의 참된 내면에 대해서 전혀 드러낼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내면은 음식에 대한 욕구 말고는 드러낼 것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안에서 사 먹는 음식이나, 보아야 하는 영화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일들은 우리가 드러내기 꺼려하는 영역 안에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의 영적 영역입니다. 인간의 소홀함과 오류가 쌓여 삶의 괴로움이 형성되는 부분이지요. 우리는 이런 숨어 있는 영역들을 서로 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주제들 뒤로 정말 자신들이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할 부분들을 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드러내기 힘든 영역, 과연 우리는 누구와 그것을 나눌 수 있을...

저만 알던 거인 - 오스카 와일드

아이들은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거인의 정원에 가 놀았다. 그 정원은 푸른 잔디가 깔린 넓고도 매력적인 정원이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꽃이 되었고 별이 되었다. 12그루의 배나무가 있어 봄에는 분홍빛, 진주빛 꽃망울이 터졌고 가을에는 달콤한 과일이 열렸다. 새들은 나무에 앉아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그 노래를 듣곤 하였다. "정말 행복해!" 아이들은 서로서로 외쳤다. 어느 날 거인이 돌아왔다. 그는 7년전 친구인 코니시 가(家)를 방문했었고 거기에 머물렀었다. 그 7년간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하겠다고. 그리고 그러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는거야?" 거칠게 소리 질렀고 아이들은 도말쳤다. "내 정원은 나만의 정원이야. 나외에는 아무도 놀 수 없어.". 그래서 그는 정원 주위에 높은 담을 쌓았고 게시문을 붙였다. [무단침입자는 고소함] 그 거인은 매우 이기적이었다. 이제 불쌍한 아이들은 놀 곳이 없었다. 길에서 놀려고 했지만 너무나 더럽고 돌 투성이였다. 그래서 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방과후에는 높은 담 주위를 배회하며 저 안의 아름다운 정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저기가 좋았었는데." 그리고 봄이 왔다. 대지는 작은 꽃과 작은 새로 찼다. 아직도 이기적인 거인의 정원만은 겨울이었다. 아이들이 없기에 새들도 노래하려 하지 않았고 나무도 새순을 터트리는 것을 잊었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머리를 내밀었으나 그 게시문을 보고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결국 땅속으로 되돌아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좋아하는 자들은 오직 눈과 서리뿐이었다. "봄은 이 정원을 잊었나 봐. 우리는 1년 내내 여기서 살 수 있어....

우리가 서 있어야 할 발판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념 속에 살아갑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바탕으로서 우리 모두가 그 위에 서 있는 기본적인 밑받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바탕은 굳건해야 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바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근본 바탕에 대해서 크게 점검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일상적인 삶을 수행하는 데에 이 신념의 점검 여부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 신념이 힘을 나타낼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통’중에 있을 때입니다. 삶이 힘들 때 ‘더 많은 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돈’이야말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돈을 추구해 왔고 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더 많은 돈이 가리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이들의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었지요. 하지만 최종적으로 이들이 맞닥뜨릴 현실은 ‘돈’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고 그 뒤에는 바로 자기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이며 그리고 그 ‘이기심’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좌절’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밖의 신념들도 다들 비슷합니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무언가를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 이들의 운명은 다들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밑바탕을 점검해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정말 올바른 바탕 위에 서 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로 막연한 신념 위에 서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호되게 뒷통수를 맞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또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분이시며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시지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너무나 나약한 단어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적 종교’...

친하다는 의미

친하다는 의미는 저마다 다양합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를 연신 외쳐대면서도 정작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서 친할 수도 있지만 정말 뜻이 같아서 친할 수도 있지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단 하루의 통교로 정말 저 사람은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반대로 나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관계로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실 ‘친구’가 아니라 ‘내 사람’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 ‘내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함께 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런 관계는 사실 굉장히 피곤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늘 나의 편인지 아닌지를 늘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정한 친구관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서로 친구가 되면 가까이 있고 멀리 있고, 얼마만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말고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가는 길을 신뢰하고 믿어 주며 최종적으로는 하늘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부부는 바로 이런 친구와 같은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모든 관계가 다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함께 원하게 되면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친구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변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생이 그 내면의 변화에 따라서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며 아버지라고 다 같은 아버지가 아닌 셈이다. 정말 열정을 지니고 사람을 살리려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그저 가능한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면서 기회만 되면 쉬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돈은 많이 받으려고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의사도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도 단순히 그 외적인 껍데기가 ‘종교적’이라고 해서 모두가 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하는 것을 올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래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에 맞게끔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며 행여 변질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맡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의 역할이 존재한다. 내 역할이 아닌 것을 함부로 넘어다보면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고 참여 가능한 공동체 안에서의 일부터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평신도는 엄연히 한 소공동체의 일원이고 또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한 단체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고, 또 심지어 이도 저도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그것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충분히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그 안의 구성원들을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투덜거리기만 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대한 덩어리가 순식간에 바뀌는 일은 없기 때문에 투덜대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좋은 핑계거리, 즉 자신이 직접적으로 속한 공동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