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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연중   제 4 주일 “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 오늘  2 독서는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우리에게   전합니다 .  “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  뽐내지   않으며 ,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  성을   내지   않고 ,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  모든   것을   믿으며 ,  모든   것을   바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그러나   이어서   복음에   예수님의   현실적   처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  앞서   말한   모든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시는   것이 분명한   예수님은 ,  정작   현실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모습을   보입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는  ...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징

1. 마귀들을 쫓아냄 예수님은 그 누구도 배척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 배척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건 바로 진리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를 돌보라고 하면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은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가는 식입니다. 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려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시기에 사로잡혀 그분을 죽이려고 드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의 빛이 세상을 비추면 허황되고 거짓된 것들은 물러나게 됩니다. 2. 새로운 언어 무슨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휴대폰이나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라는 것은 천상적인 언어, 즉 하느님만이 지니신 고유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거래'를 합니다. 악인들도 서로의 뒤를 봐 주고 돌보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는 빛을 찾는 이들에게 빛을 주는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이전까지의 신앙인들이 사용해 오지 않던 언어입니다. 3. 뱀과 독에 해를 입지 않음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바는 '영혼의 해악'입니다. 뱀과 독이라는 것은 사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과 더러운 영적 가치들을 말합니다. 의인은 그러한 것들을 가까이 두더라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내면에 그러한 요소들에 물들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와 함께 지냈지만 그에게 물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그분의 육신에 '죽음'의 손상을 입혔지만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분에게 부활이라는 영광을 선물합니다. 4. 병의 치유 병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몸의 병도 병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뿌리깊은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의 제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병을 치유해...

하느님 앞에서 선한 사람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는 축에 올려놓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은 흔히 손가락질 당하고 지탄받으며 불명예를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의 평가가 '선하게' 내려지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는 그 평가의 기준점입니다. 사람들이 '선하게 보이기'를 기대하는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평가는 외적 기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내면으로는 전혀 선하지 않아도 겉으로 짐짓 선한 척을 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 사이의 평가에서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이라도 기도 생활에 열심인 척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외적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신앙에 열심한 신앙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본 뜻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키지 않더라도 성경을 베껴 써서 주교님의 표창장을 받은 사람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신앙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함이라는 기준은 단순히 외적 지표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질적인 선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게 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요한 5,41-4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선함이라는 것은 외적 지표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의도를 품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항상 하느님의 참된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늘 추구하는 것을 실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이기성을 바탕으로 겉꾸며진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이기적 선택의 순간에 하느님보다 스스로의 이득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세상은 혼탁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생명을 찾는 이, 죽음을 찾는 이

초전지역의 야경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은 당대 문화와 신앙의 핵심 지역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징적인 신앙의 도시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다른 하나는 그곳이야말로 사람들의 추악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예루살렘에 오늘 두 종류의 사람이 모여듭니다. 하나는 바로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동방의 박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곳의 왕좌에 늘 머물고 있던 헤로데 임금과 그 수하들입니다. 한 측은 빛을 따라서 생명을 구하러 왔고 다른 한 측은 그 생명의 빛을 꺼뜨리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고자 또는 그 삶의 소식을 만방에 전하고자 왔고 다른 하나는 죽이고자 어둠 속에서 계획하려 모여들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순진합니다. 자신들이 누구를 마주하고 있는지 누구에게 길을 묻는지도 모르는 채 순진하게 갈 길을 묻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여기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더럽고 추악한 이들을 통해서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여정을 시작해서 결국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반면 헤로데 임금과 그 수하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면서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직접 따라갈 의지도 없고 게으르며 자신들의 꾀를 너무나 신뢰한 나머지 동방의 박사들만 보내면서 돌아올 때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손에 얻는 걸 실패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주 아주 먼 곳에서부터 아기예수님의 흔적을 찾아왔고 그 끈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일당들은 가장 가까이 머무르면서도 그분의 은총에 기뻐하기는 커녕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었습니다. 결국 동방 박사들은 임금에게 자신이 준비할 수 있었던 최고의 예물을 바치고 그보다 더 소중한 은총과 구원을 얻어 돌아갑니다. 반면 헤로데는 일대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죽여 버리지만 결국 그 영혼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