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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0의 게시물 표시

행복을 누가 싫어하는가?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이신 분은 그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선물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에 그 선물은 당연히 영원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참된 행복은 당연히 '영원한 행복'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주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시 빼앗아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상대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이신 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고자 하십니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행복의 수준 차이가 생겨나게 됩니다. 지상에서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순간의 쾌락을 느끼는 것도 인간에게는 '순간이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 줍니다. 술도, 담배도, 마약도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나버릴 행복'은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탐하는 인간은 결국 꺼져버릴 행복을 소유하고, 혹은 희망하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가지기 전에는 가지지 못해서 불행하고, 반대로 가지고 나서는 잃어버릴까봐 걱정에 시달려야 하기에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지상에서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것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유이고 수많은 성인들의 순교의 열정을 칭송하는 이유가 됩니다. 영원한 행복에 대한 갈망과 실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들의 노력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 의지의 동의가 필요하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

무엇을 살릴 것인가?

귀금속 장신구를 잔뜩 지닌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구조요원이 뛰어들어서 물에 잠겨 들어가는 사람을 수면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급요원은 그의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낸 뒤에 그를 다시 물 속에 잠겨 들도록 버려두고 홀로 물가로 나옵니다. 그리고 건져낸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사람들 앞에 보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구해 내었습니다." 무엇을 구한 것일까요? 아니, 무엇을 구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물 밖에서 구조요원을 기다린 사람들은 어떤 것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되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이번 기회에 물에 빠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일찍부터 물 속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란트 하나를 땅에 묻어두고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땅 속에서 달란트는 녹슬어갔고 점점 그 하나 자체로도 쓸모없는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활용을 해야 했고 그것으로 다른 달란트를 벌어 들여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사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라질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기존 교회의 구조와 틀이 아닐까요? 성당의 재정과 인력 충원이 걱정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진정 살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두고 있을까요?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떤 수단들이 보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렇게 다가선다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더 쉽고 빠르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마련한다면 여전히 할 일은 많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껍데기를 쓴 컨텐츠를 양산해 내는 것은 또...

공허한 정신에는 진리가 깃들 수 없습니다.

정신이 공허함에 빠져 있게 되면 올바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사탕을 더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이에게 식사를 하라고 초대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리는 가까이 있으나 우리가 그 진리에 다가서지 않는 이상 우리를 밀고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올바른 선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 정신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나서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피상성'에 젖어들게 됩니다. 즉 외적 껍데기로서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될 뿐 실속있는 신앙, 참된 신앙에 나아가지 못하는 찌뿌둥한 정신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지나치게 즐기는 사목자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는 하지만 그에 온전히 몸담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우리를 그릇됨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론상의 진리'가 아닌 실천적인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진리는 나이 많은 어르신부터 이제 갓 지력이 깨어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함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나 언어적 기원을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선한 것이 바람직하고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 세속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할 때에 이 기초적인 진리가 망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요약한 모든 율법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질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반대로 세속의 이끌림에 올바르게 저항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전혀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달리기 단상

달리기를 하면서 부쩍 안정되어가는 제 육체를 느낍니다. 항상 뭔가 찌뿌둥하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면서도 어딘가 아파오던 육체가 다시 탄탄하게 잡혀가고 생기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은 더 훈련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아침에 운동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피로감이 몰려 와서 다른 일을 손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500미터를 달리는 것만 해도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 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제 2키로 정도는 꾸준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이상을 넘어 달려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무리가 가는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번 한 주가 다르고 또 다음 한 주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달리기에는 호흡이 중요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숨을 쉬고 있다가는 어느 새 헐떡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호흡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면서 내가 하는 호흡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지만 딱히 숨을 특별히 따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쉬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산소가 부족하면 들이키는 것이고 들이켰으면 자동으로 내뱉을 뿐입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면 그 호흡이 느껴지게 되고 호흡을 가로막는 아주 작은 계기라도 전체의 몸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아침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간이 가장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점심을 먹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식사 후의 몸의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서 마냥 걷게 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아침이 좋은 이유는 그 특유의 시원함 때문입니다. 날씨가 점점 더 더워져가면서 그나마 덜 더운 아침 시간이 운동하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시간을 더 즐기게 됩니다. 뛰는 동안은 항상 의지와의 싸움입니다. 언제라도 멈춰 버리고 싶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몸이라는 녀석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언제나 더 편하고 쉬운 것으로 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가...

신앙은 감정적 흥분이 아니다. 실천적 응답이다.

그것은 감정적 흥분의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명 연예인이 자연을 보호하자고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도 함께 감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수십평의 크기의 집에 가정부까지 두고 살아가는 엄청 부유한 연예인이 자신의 삶이 힘들다고 방송에 나와서 눈물을 보여도 실제 존재하고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직시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런 감정적 흥분의 상태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동시에 내 내면의 '자유의지'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진리의 총집합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 묶인 이를 풀어주고 억압된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진리의 행위 앞에서 우리는 '응답'을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앙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헛된 감정적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의 구체적 실천이 뒤따르게 됩니다. 즉 반대로 이야기해서 삶이 뒤따르지 않는 일시적인 동기부여의 상태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짠 맛을 잃어가고 빛을 잃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응답'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린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고 계시고 우리의 응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대답을 이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두려움을 조장하는 신심을 조심하십시오.

신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항상 존재하는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까지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나 '모자람'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기초적인 상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그릇된 신심 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모자라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면서 지나치게 과중한 심적 부담감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책임있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더한 열성을 내도록 강요하면서 결국 자신들이 주창하는 신심 행위에 전적으로 빠져들도록 만들어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으니 바로 '부자됨'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를 채찍질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벌어도 벌어도 항상 뭔가 부족한 듯이 느껴지도 항상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내가 가난하고 부족하다고만 생각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 자체가 이미 잘 살고 있고 충분히 인간으로서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비슷한 일이 '영성'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라선 계단보다 항상 한 걸음 정도만 더 높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합니다. 헌데 그릇된 형태의 신심은 우리에게 긴박감을 조성하고 우리가 하는 노력 자체를 부족함으로 치부하면서 지나치게 무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신심활동 단체에서도 때로 발견되는 오류이지만 그래도 지도 신부님이 계시고 교회와 연계를 맺고 있는 단체는 아무래도 심각한 오류에 빠져들기는 힘든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징표를 읽어라!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이라는 두려움으로 신앙인들을 붙들어온 지가 한참 되었다. 설레고 기뻐서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제외될까 두려워서 겨우 붙어 있던 시간들이었다. 코로나가 오고 이제는 교도권에서 먼저 관면을 주었다. '바이러스가 있는 동안은 주일 미사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헌데 이 바이러스가 사라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덕분에' 푹 쉬게 되었다. 그마나 지탱되어 오던 최후의 신앙감이 끊어지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 미사 참례율이 60%대로 뚝 떨어지게 되었다. 교회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미사를 '그리워 할' 것이라고. 그러나 일어난 일은 정반대이다. 사람들은 이 참에 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게 마련인데, 교회가 이부자리를 깔아 준 김에 깊이 잠들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신자들이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진 도구의 날을 세워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는다. 누군가 언젠가 무언가 하겠거니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성가시고 힘든 일을 맡길 뿐이다. 어떤 연구팀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겠거니 생각만 할 뿐 설령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더라도 참여할 의지가 별로 없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현실은 모든 이에게 어마어마한 도전이 되는 시기이고 이는 교회에도 마찬가지 현실이다. 우리는 이전의 동일한 수단과 방법만을 지니고서는 앞으로 다가오는 이 시기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 전에 하던 것을 조심스럽게만 반복해서 신앙감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복음 선포의 구체적 방식을 연구해야 할 시기이다. - 감염의 걱정 없이 마주할 수 있는 만남의 수단 강화(youtube, zoom 등 활용) - 성당이라는 영역에 국한되지 않은 복음 선포의 자리 재인식(직장, 친구 및 친지모임 등) -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신앙생활의 구체적 방식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