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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승리에 대한 두가지 관점

우리는 '이긴다'는 개념에 대해서 그릇되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대결에서 이기고자 하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그를 무릎 꿇리고 처참하게 만들어야 내가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비굴하게 만들고 복종시켜야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스승이신 주님은 '이긴다'는 개념을 전혀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이 승리를 이루십니다. 즉 주님 안에서 '승리'라는 개념은 단순한 피상적 승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영원한 승리입니다. 즉 어둠이 영원 안에서 무릎 꿇는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이 참된 승리를 위해서 오히려 현세에서 당신 생명을 내어주는 결정을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먹히는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짐으로써 그 십자가의 승리에 동참하도록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함께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근본적인 승리관에 대한 차이가 현세를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어떻게든 남을 짓밟아 이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긋하고 여유롭게 하느님의 승리를 희망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자신들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걸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지상의 승리가 짓밟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 안에서 승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쓰러짐이 영원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견뎌낼 줄을 압니다. 지상의 온갖 쾌락과 환락에 도취되어가는 이들, 그들은 훗날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른 이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

혼돈

우리는 끊임없이 기사와 광고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그 광고들은 최대한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들지만 그 안에는 모두 비슷한 영혼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날 쳐다보고 욕구해요"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욕구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하는 것들이지요. 그래서 현대는 더더욱 사람들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주체성이 존재하지 않고 타인에게 그것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나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 없고 타인에게 생각을 맡기는 이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행복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 강요하는 소리에 자신의 내면까지도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어야 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해,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해... 이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주된 사고입니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이기성'이 깊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유익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이기성'은 영원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종교를 '새로운 구속'이라고 쉽게 정리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참된 신앙이야말로 진정으로 선하시고 자유로우신 분, 있는 자이신 그분에게로 우리가 다가서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목소리들 사이에 파묻혀서 마치 밤하늘의 별을 찾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는 그 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별을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원하는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묵시 21, 3-5)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지금 우리 눈 앞에 생생히 펼쳐져 있는 세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즉 이전 것들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을 우리는 지금의 이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좀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영역은 바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영역이기에 우리로서는 함부로 상상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로지 자신의 내적 '결의'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옮아감, 그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지닌 믿음입니다. 즉 세상의 원리와 원칙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이 시작된 원리와 원칙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기본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가올 세상에는 이 사랑이 만발할 것이고 그곳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수용하기에는 너무나도 흐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로 다가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근본에는 바로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그로 인해서 야기된 죄와 그 악습이 존재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건전한 가정의 기쁨을 가르쳐봐야 크게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마음...

말씀을 물리치는 이

1. 하느님 아버지 2. 그분에게서 나온 말씀 3. 그 말씀을 전하는 이 4. 그 말씀을 수용해야 하는 이 하느님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 말고는 그것을 지닌 존재가 없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에서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은 초대의 말씀입니다. 즉, 영원하지 않은 존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는 그 말씀을 이미 수용했기에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남들에게 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번과 2번과 3번은 모두 하나입니다. 그리고 공동 운명체입니다. 문제는 4번에서 시작됩니다. 그 말씀을 수용할 수도 있고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한다면 간단하게 공동운명체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앞에 둔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그가 말씀을 수용하지 않을 때에 바로 그 말씀이 그의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선과 사랑으로 초대하는 말씀 그 자체가 그에게 심판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겠지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스스로 내쳤다는 사실이 바로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 날이 올 때까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취사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죄악까지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자유를 책임있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을 선택한 이는 그에 합당한 상급이, 그것을 거부한 이는 합당한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48)

기적

기적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억지를 부려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흐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갑니다. 가장 교만했던 한 인간이 자신을 낮추는 결심을 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들어갑니다.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내적인 진정한 회개, 하느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갖추는 것이 그의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총을 빼앗으려는 이들이 넘쳐 흐릅니다. 이런 이들은 특정 종류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 은총을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열심을 드리면 하느님이 그 값으로 기적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지상생명을 포함한 자신의 전 존재를 다 계산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먼지와도 같은데 말이지요. 어리석은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은총이 얻어지는 게 아니라 '회개', 즉 방향을 돌이키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도 자유로운 분이라서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인물을 의무적으로 사랑하지는 않듯이 하느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로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다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거두어집니다. 반면 하느님의 눈에 들어서 사랑을 주었더니 더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은 사랑을 더욱 많이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고 무조건 기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돌아설 때 기적입니다.

힘의 논리와 하느님의 뜻

힘을 선점하려는 일은 '이기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힘을 선점해야 자신의 이기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획득한 힘을 절대로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부를 특권으로 삼고 그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절대로 자신이 차지한 특권을 함께 나누지 못하도록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건 힘의 논리가 기본이 되는 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기본입니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는 것은 어느 동물에게도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기본은 동물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일상입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고 그분이 의도하는 바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신앙과 세상이 충돌하는 지점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어느 예언자도 이 부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충돌을 야기했고 그래서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는 운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부의 재분배를 꾀하거나 사회구조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정당함'을 회복하려는 것 뿐입니다. 자연스러운 구조를 넘어서서 인간의 이기심으로 한 측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돌려 놓자는 것이었지요. 회사의 사장은 자신이 성실히 일해 번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골프를 칠 수도 있고 좋은 자동차를 탈 수 있습니다. 그건 그가 정당하게 번 것에서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몫입니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의 누적된 부가 누군가에게 정당히 주어져야 할 몫에서 빼앗아 온 것이라면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 성실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

새로운 하와

아내는 아름다워야 했다. 광고는 늘 새로운 소비 주체를 찾아내어야 했고 그것은 당연히 남편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아내들이었다. 그래서 광고는 끊임없이 아내들에게 당신은 아름답다고, 아니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광고의 적극적 소비 주체인 주부들은 그에 세뇌되어 가기 시작했다. 인생은 한 남자에게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자녀들에게 얽매여 사는 것은 미개한 주부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꾸민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야 했다. 자연스레 그들이 사랑받는 대상은 남편에게만 국한되지 않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마음에 허영이 불어넣어지자 당연히 가정은 서서히 와해되어 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것이 유행이 되고 주름지지 않는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갖추는 것이 주된 과업이 된 그들에게 '헌신'이라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다. 선악과는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경시였고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로부터 내려오는 올바른 권위에 대한 거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가정 안에 죄의 씨앗이 침투해 들어왔고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쁜' 성모상을 찾지 엄마와 아내의 헌신을 담은 현실적인 성모상을 찾지 않는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도 많은 허영이 깃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한 신앙,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신앙생활이 그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게 된다. 바리사이들의 허영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활기를 치고 있고, 뱀과 같은 악마는 가정을 메인 타겟으로 삼았으며 그 가정의 가장 중심 연결고리인 여성의 위치를 아주 기민하게 내리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 남성들의 삶의 자리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대외적인 일을 하면서 가정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성당에서 남성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여성들은 성당에 넘쳐난다. 어떤 활동을 하더라...

먼지로 돌아가리라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고 미디어는 명예를 추구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교묘히 뒤섞이고 나면 거기에는 '사랑'을 추구하는 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인은 온갖 매체들에서 쏟아지는 이 추구의 방향 속에서 자신들이 갈 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방향인지 전혀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한동안 하나의 주제를 뒤쫓다가 그것이 실패하거나 의미가 없어지면 또 새로운 방향으로 뒤틀어 달려가봅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내어놓는 그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만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돈을 벌어야 만족할까요? 지구를 자원으로 삼아 제 맘대로 다 쓰고 나면 만족할까요? 부자들은 이미 달에도 땅을 사 두었고 화성까지 넘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보면 태양계가 비좁아질 정도겠지요. 부자들에게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권력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결국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하고 나면 내려놓아야 하는 권력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세상을 호령한다고 해도 금세 반란이 일어나고 뒤집히는 것이 일상입니다. 인기라는 것은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유행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온갖 묘기를 부려 보지만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끊기고 그는 외로움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아직 '덜 채워져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그러나 모으고 쌓아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근본적으로 '죽음'이라는 가장 큰 수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먼지일 뿐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