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죄에 맞서 싸우기

성경은 우리에게 얌전하라고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싸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싸운다'는 단어만 생각하면 부정적인 영역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무턱대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싸운다는 말을 겨루어 이겨낸다는 단어로 바꾸면 조금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는 구원의 여정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겨내야 하는 여정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살아 남으려면 여러가지 도전들을 직면해야 하고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아무도 거저 입에 밥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형제가 여럿인 집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형제 간에도 겨루어야 했습니다. 신앙도 그저 숟가락 물고 앉아 있으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수동적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힘을 내어서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헌데 신앙의 싸움은 세상의 여느 싸움과는 남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싸움의 대상에 '죄'와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면에서 이 싸움은 흔히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싸움을 전제로 합니다. 즉, 외적으로 실력을 겨루는 일이 아니라 내면의 선과 성실성, 믿음과 희망을 꾸준히 키워 나가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쉽게 무시해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눈에 보이는 돈을 겨루는 일이면 적어도 목표가 뚜렷해 보이는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그 목표점이 하느님이라는 분으로 흔히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편하게 '없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부터 지는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싸움을 숫제 시작도 하지 않은 채로 패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꾸준한 의지적 선택을 전제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라면 손에 쥐면 잡히는 그것을 위해서 열성을 내겠지만 ...

하느님의 뜻

우리가 지구 위에 있지만 지구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라서 마치 우리에게 하느님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에 의해서 매 순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도 우리의 전체의 생애에 꾸준한 영향을 미친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양심'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하느님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중력'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선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으며 옳지 않은 일을 할 때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된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개인의 인생 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는 자유를 지니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절대로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결론지어 버리고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시는 분을 믿는 신앙인들은 당신의 아들과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있는 삶을 살고 성실하고 꾸준한 삶을 영위한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에게 끊임없는 '청원'을 드린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꾸준한 청원 속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꾀할 수 있고 하느님의 본뜻을 더 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 의로움, 거룩함, 속량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편협한 사고를 뛰어넘습니다. 전쟁을 해서 누구 힘이 더 센가? 어디를 공략해야 우리가 승기를 잡을 것이며 상대를 더 철저히 파괴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어리석은 십자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음이 지혜가 됩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세상의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이해하는 지혜가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의로움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곧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정한 법칙과 규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 의로움의 기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함을 드러내도 하느님의 뜻은 똑같은 곳에서 우리에게 빛을 비춥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고 여전히 그 기초적인 가치는 우리에게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수난 당해야 하고 죽어야 하고 부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의로움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밖에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거룩해 보이는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거룩해 보이는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곧잘 인간의 허영이 들어있는, 사실 의로움과 상관 없는 활동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는 활동이면 무엇이나 거룩함에 도움을 주는 활동이 됩니다. 여기서 식별과 분별이 필요합니다. 언뜻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하는 활동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활동이 있습니다. 성당 활동을 한다면서 성당에 나아와 누군가의 험담이나 하고 있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성당'의 느낌이 물씬 나는 활동이지만 내적으로는 오히려 나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활동이 됩니...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

우리는 가난이라는 것을 죽도록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곳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가난한 시절의 고생은 두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경험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가난이라는 것이 그저 고통만을 선물한 괴로운 경험이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 살면서 극도의 가난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틀면 나오는 수도에 끊임없이 흐르는 인터넷으로 저마다의 손에 들린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면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집집마다 있는 차에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고 그저 배고픔을 달래주는 음식이 아닌 더 맛깔난 음식을 찾으며 머나먼 곳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제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배 곯던 시절을 지나 너도나도 다 기본은 갖추고 살아가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 우리는 다들 행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은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의 시절에 존재했던 것들을 추억하는 이들이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이웃들은 정말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가난하기에 서로가 없으면 생존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누가 일하러 나갈 때에 자신의 자녀를 옆집에 맡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형제간이 많아서 비록 옷을 물려입긴 했지만 가족의 유대관계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잘 산다는 자녀들이 오히려 더 찾아오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부족함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천지신명의 뜻을 찾았고 하느님을 알고 나서는 우리가 아는 거룩한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백성이 가진 고결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줄 알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올바르...

아직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두려움은 미지의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대상에 대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잘 아는 대상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면 되니까요. 예컨대 전쟁이 난다는 소식이 두려운 이유는 어떤 과정으로 어떤 결과가 미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적군의 공세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느 지역부터 침공해 들어올지 알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피난을 가던지 수를 내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애 가운데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 하고 따라서 두려움은 인간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이를 극복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인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대상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의 도약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근본적으로 '부활'에 대한 신앙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을 형성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쫓아다닌 제자들도 제대로 형성해 내지 못한 신앙이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은 각자의 삶의 자리 안에서 초대를 하십니다. 언젠가 어느 순간엔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원'을 향한 초대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과 더불어 영원한 진리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는 여정으로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저마다 주어진 자유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도 없이 많은 기회를 가졌는데도 그 응답을 형성해 내지 못하는 것은 하...

두 신자

오늘은 두 종류의 신자분을 만났습니다.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육체적 한계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분과 다른 특별한 제약 없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런 저런 이유를 핑계로 성당에 나오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양자를 모두 바라보십니다. 성당에 나오고 싶다고 문득 건강을 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고 벌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제를 두셨고 둘 사이에 올바른 '사목'을 행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소명을 다하고자 둘 다 찾아가서 서로 다른 온도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측은 위로와 성사적 축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기본적으로 선물하시지만 우리의 탓으로 또는 때가 이르러 그 건강이 더이상 지속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많은 위로와 방문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그의 주변에 그 역할을 수행할 사람을 늘 두십니다. 그리고 한 측이 가진 약점이 다른 이의 헌신의 이유가 되게 하십니다. 반면 다른 측은 온유한 꾸짖음입니다. 지금 실행하고 있는 행동의 심각성을 깨우치고 더이상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놀지 않도록 충고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온유함과 더불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권고하고 또 꾸짖으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티토 2,14-15) 우리는 신앙은 그저 부드러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다루는 데에 그저 부드럽기만 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바로 잡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고 강단있는 결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 흔히 사람들은 그런 충고를 건네는 사람을 싫어하게 마련입니다. 인기라는 것은 달콤한 유혹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하지 거부 당...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

예수님은 우리를 강제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전능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으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힘이다. 정말 원한다면 이 세상 전체를 삭제하고 다시 시작해도 무방한 전능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세상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그 하느님의 고귀한 섭리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수난 당하시고 죽은 그 방법 그대로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위협들이 다가온다. 가깝게는 우리 생존의 문제부터 해서 거시적으로는 민족의 전쟁과 인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협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여러가지 위협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은 여전히 실행 중이며 진행 중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크고도 넓은 의미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안에서 고난과 시련은 분명히 다가 오겠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반드시 실행될 것이니 그 안에서 영혼은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풍랑 안에서도 예수님이 뱃고물을 베고 주무신 것처럼. 하느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때로 마주하게 되는 우리의 무기력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에게 믿음을 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약함은 가장 큰 은총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섯 개의 날개

우리가 천사를 잘못 생각하는 건, 천사의 이미지가 현세의 사람에게 '영원'의 모습 그대로 다가오지 못하고 또한 '영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이사 6,2) 둘의 날개는 발, 이 발은 우리 몸에서 발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가 담고 있는 의미가 발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천사는 과거를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을 조심스레 감추어둔다.  발을 가리는 날개가 그러하다면 '얼굴'은 미래가 된다. 천사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미래도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 그리고 날아다니는 날개는 현재를 의미한다. 천사는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지만 그것을 조심스레 감추고 현재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