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이라는 것을 죽도록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곳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가난한 시절의 고생은 두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경험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가난이라는 것이 그저 고통만을 선물한 괴로운 경험이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 살면서 극도의 가난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틀면 나오는 수도에 끊임없이 흐르는 인터넷으로 저마다의 손에 들린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면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집집마다 있는 차에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고 그저 배고픔을 달래주는 음식이 아닌 더 맛깔난 음식을 찾으며 머나먼 곳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제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배 곯던 시절을 지나 너도나도 다 기본은 갖추고 살아가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 우리는 다들 행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은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의 시절에 존재했던 것들을 추억하는 이들이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이웃들은 정말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가난하기에 서로가 없으면 생존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누가 일하러 나갈 때에 자신의 자녀를 옆집에 맡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형제간이 많아서 비록 옷을 물려입긴 했지만 가족의 유대관계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잘 산다는 자녀들이 오히려 더 찾아오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부족함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천지신명의 뜻을 찾았고 하느님을 알고 나서는 우리가 아는 거룩한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백성이 가진 고결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줄 알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두려워하고 섬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앙은 계모임의 일환으로,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바뀌어 언제라도 수틀리면 내던질 수 있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이 더이상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욕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대상, 그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할 때에는 필요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고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더는 '가난하지 않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련하다는 말의 의미도 가난과 결을 같이합니다. 이는 신분 자체가 미천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내면을 지닌 이들이 흔했습니다. 흔히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유생들에 반대 자리에 위치한 머슴들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낮은 마음은 자신의 자리에서 특별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찌 보면 오히려 일상의 체험이 특별한 체험이 됩니다. 어떤 음식을 사주느냐가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음식을 사준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 됩니다. 어떤 신부가 강론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직 교회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있다는 것이 기쁜 일이 됩니다. 이런 가련한 마음을 지닌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에 적합한 이들입니다. 천국은 특별한 체험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천국이 도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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