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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의로움, 거룩함, 속량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편협한 사고를 뛰어넘습니다. 전쟁을 해서 누구 힘이 더 센가? 어디를 공략해야 우리가 승기를 잡을 것이며 상대를 더 철저히 파괴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어리석은 십자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음이 지혜가 됩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세상의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이해하는 지혜가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의로움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곧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정한 법칙과 규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 의로움의 기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함을 드러내도 하느님의 뜻은 똑같은 곳에서 우리에게 빛을 비춥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고 여전히 그 기초적인 가치는 우리에게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수난 당해야 하고 죽어야 하고 부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의로움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밖에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거룩해 보이는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거룩해 보이는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곧잘 인간의 허영이 들어있는, 사실 의로움과 상관 없는 활동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는 활동이면 무엇이나 거룩함에 도움을 주는 활동이 됩니다. 여기서 식별과 분별이 필요합니다. 언뜻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하는 활동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활동이 있습니다. 성당 활동을 한다면서 성당에 나아와 누군가의 험담이나 하고 있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성당'의 느낌이 물씬 나는 활동이지만 내적으로는 오히려 나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활동이 됩니다. 성당에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가정의 기초적인 요소를 내팽개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따뜻한 밥상 하나 제대로 차려주지 않으면서 성당에 와서 봉사한다고 한들 그 봉사가 거룩함의 요소가 될 리가 없습니다. 올바른 식별이 이루어지지 않는 활동들은 오히려 우리를 거룩함에서 떼어 놓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식별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모든 거룩한 신심 활동들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갑니다.


하느님에게 돌아서는 것이 속량입니다. 이는 두 단계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어둠과 악에서 속량되어야 합니다. 어둠과 악은 그 자체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끊어 놓습니다. 이는 시급하게 끊어야 하는 내면의 어둠입니다. 어둠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악한 의도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즉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오류에 빠진 사람이 되고 하루하루 죄를 더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내면에 우리의 양심이 인지하는 오류가 있다면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현세적인 것에서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저 몸이 멀어진다고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와도 세속 걱정에 잔뜩 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몸만 성당에 와 있을 뿐 마음은 세속에 묶인 사람입니다. 반대로 세속 안에서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속 안에 살아가지만 속량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비록 악한 의도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내면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묵시록에서 예견한 것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으니 입에서 뱉어지게 될 사람입니다. 우리의 길을 시작했으면 열심히 달려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경기에 나선 사람들이지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열심히 달려 주어진 상급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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