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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삶의 교훈

누군가가 아픈 경험으로 삶의 교훈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경험을 나누게 되고 간접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당사자도 또 주변 사람들도 그 경험에서 빚어진 교훈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경험을 글이나 이야기로 전해 주려고 하지만 그렇게 전해진 글이나 이야기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실천적인 새로운 경험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런 경험을 반복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이야기로 전해 들은 것을 그대로 나의 체험으로 녹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영적 백신을 맞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 안에 앞으로 다가올 실제적인 일에 대한 선체험을 새겨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본질적인 체험이 시작될 때에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선체험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달되는 내용의 핵심을 놓쳐 버리고 '위험군'에 속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와 같은 것들은 원하면 우리가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수단과 방법의 문제이기보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달아 뉘우칠 일이 없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핵심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녹여내서 전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메세지는 공허하게 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수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준비했을 것을 미리 전달된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통에 스스로 놓쳐 버린 기회들에 대해서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

교회를 이해하는 법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인간의 뼈와 각 장기의 기능, 세포 조직과 호르몬 작용 등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살펴서 그 구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인간의 행동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문화활동과 종교활동 등으로 인간이 구체적으로 하는 일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합니다. 교회를 1차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교회의 건축물과 제도, 법률 등을 바탕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그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주일 미사를 빠지면 어떤 법령에 어떻게 저촉되어 성사를 어떻게 보면 되는건지, 우리 성당에 당장 필요한 '공간'은 무엇이고 '인테리어'는 어떻게 바꿀 것이며 새로운 '건물'은 어떤게 필요한지와 같은 요소들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이들은 교회의 1차적인 외적 면모를 바라보고 걱정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걱정이 전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면 당연히 그 아기가 무럭무럭 잘 자라도록 알맞은 영양분을 주어야 하고 또 근육이 형성되도록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장의 의무가 끝나는 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사실 이 첫째 단계의 성장보다는 둘째 단계의 성장, 즉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를 좀 더 중점적으로 살피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비를 맞으면서 미사를 드려야 하는 고민을 하는 본당은 없습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기본'을 갖춘 본당들이 즐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너무나 피상적이고 구태의연한 방식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있습니다. 늘 하는 행사, 작년에 했던 일로 나날이 반복되...

내어주는 선

선이라는 것은 '딱 맞게' 떨어지는 영역이 아니라 내어주고 베푸는 영역입니다. 내가 물건을 받았는데 그 물건이 내가 그 사람에게 준 돈과 똑같은 가치의 것이라면 거기에서 내가 감사를 전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물건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받았다고 느낄 때에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이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선은 나를 깎아서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이 선을 제대로 실천하는 이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선행을 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 알고보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다른 형태로 받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면서 그것을 전면에 광고해서 사회적인 이미지를 고취시키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어떤 좋은 일을 하는지 은근슬쩍 드러내서 자신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내어주고 내어주고 생명마저 내어주고 지금도 내어주고 계신 그분에게서 우리는 받고 또 받습니다. 신앙으로 이끄는 길을 전해 받고, 또 당신의 말씀을 전해 듣고, 그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이지요.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선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이 받은 것은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점점 더 구두쇠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이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빌라도와 진리

빌라도는 행정관이자 재판관으로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관계' 또는 '정보'와 같은 것들이 필요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확신'을 얻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진리에 대한 탐구는 '거짓을 말하는 자들' 앞에서 혼선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드러낸 진리는 당신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고 따르고 그분의 의지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삶 자체가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체로 진리의 광채를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그저 한낱 의심스러운 인간이자 다른 세상의 능력(재화, 명예, 권력)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인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를 맞대면하게 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단편적인 진리 역시 최종적으로는 참된 진리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진정한 진리를 마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른 세력, 즉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 온 권력을 흔들 수 있는 사람들의 의지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참된 진리를 저버리고 그를 살인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신앙의 문화적 환경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맞대면하고 그 앞에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를 무절제한 술자리로 이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리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절제를 훈련하고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더라도 참된 진리를 고수하기를 요구합니다. 빌라도의 문제는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진리를 앞에 두고 그분께 이렇게 묻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무엇이 우선인가?

'복음화'라는 말만큼 광범위하고도 힘이 없는 말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듯이 이 핵심 과제야말로 우리 교회에 뿌려져야 하는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제가 본당에 가서 무엇을 느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나서 처음 그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의 외모와 옷차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챙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들게 됩니다. 처음 가보면 이런 것도 없어 보이고 저런 것도 없어 보이고 이런 것도 불편해 보이고 저런 것도 불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마주치는 것은 교회의 인적 구조입니다. 이런 저런 직분이 필요할 것 같고 사람이 아쉽고 또 지금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조금은 지켜봐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한 사제가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버둥거리다 가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 미미한 움직임이라도 정말 필요한 핵심 요소에 쏟아부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릅니다. 저는 교회의 힘의 본질은 '복음전파'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잘 전달된 본당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게 되고 그리고 그 복음을 중심으로 기쁜 공동체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들이 필요한 외적 요소를 갖추기 위해서 힘을 모아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외적인 것부터 챙기려고 들면, 사람들이 지쳐 떨어져 나갑니다. 충분히 밥을 먹지 않고 일을 시키면 허기가 져서 하던 일도 멈추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영적 양식을 충분히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 다음 책임자부터 일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사람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평가를 하는 것과 그 사람과 만나서 시간을 나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사람에 대한 소문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편협해 질 수 있지만 그와 만나는 일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과 말투, 태도와 마음씀씀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관념적으로 만나고 거기에서 멈춰 버립니다. 무성한 소문만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대부분 그분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지요. 한 명의 종교 지도자로, 개혁가로, 리더로 생각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편협한 생각으로 편협한 의견을 개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또다시 사람들은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직접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그분은 이미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고 전해져 오기 때문에 적어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인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대에 다시 만날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개념 속에는 그와 눈을 마주하고 소리를 듣고 손을 잡는 등의 행동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남'이라는 것은 그런 차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격과 다채로운 만남의 차원을 지닙니다. 우리는 그의 성격과도 만날 수 있고 그의 영혼과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이들, 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면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영이 아닌 하느님의 영, 거룩한 영을 지니고 사람들을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유보다 더 뛰어날 것인가?

우리는 '자유'를 사랑합니다. 뜻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소중히 여기고 그 가능성을 더욱 넓히려고 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것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앙에 몸담는 이들이 부딪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명'이라는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 순명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와 상충되는 다른 사명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굴종'은 아닙니다. 순명은 나의 뜻이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이 무조건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그 직전에 우리에게 가장 온전한 형태의 자유를 제시합니다. 즉, 순명의 대상 자체를 수용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분명히 있고 그 뒤에 순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명은 사실 우리의 자유가 가장 온전하게 꽃피는 순간입니다. 상대의 명을 따르기를 나 스스로의 자유로 결정하는 상태, 그것이 순명의 올바른 상태인 것입니다. 올바른 순명을 위해서는 올바른 식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식별은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사명이 진정 누구에게서 비롯하는 것인지에 대한 검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에 따르기 위해서 순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순명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본래적으로 의도하신 안식일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선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올바른 분별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전통을 넘어선 하느님의 본연의 뜻을 완수하고자 그 일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명에 실패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 어떤 명령이든지 거부하고자 하는 나의 엇나간 자유가 저변에 깔려 있고, 이어 나에게 다가오는 사명에 대한 겉핥기...

삶의 안정에 대한 추구와 신앙적 굳건함은 서로 반비례한다.

믿는 구석이 있을 때에 우리는 안정성에 기대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갈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고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히려 '부족함' 속에서 나아가도록 요구 받았습니다. 얼마전 다녀온 성모성지 순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르드를 가기 위해 들른 파리에서는 파업과 시위로 인해서 지하철과 대중 교통이 멈춰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르드를 가기 전날에 예약해 둔 기차가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절망하고 가만히 머무른 게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았습니다. 비록 비싼 값이었지만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었고 결국 목적하던 성지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이 커나갈수록 삶의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확립되고 나면 우리는 더이상 불안증에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믿음이 없는 이는 자신이 늘 안정을 누릴 대상이 필요하고 그래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더욱더 중독되어 가고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은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해서, 혹은 누군가가 나를 억압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에서 내 마음 속에 믿을 구석이 없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굳은 믿음은 가장 확고한 안정을 보장해 줍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커져 나갈수록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이기는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실행

사랑을 디자인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지만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집에 아주 작은 꼬마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하는 모든 일이 미숙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맡기지 않으면 그 아이는 영영 성장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맡기신 것은 그 안에서 사랑을 훈련하고 연습해서 성장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전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정작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두고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다가 힘든 나머지 모든 것이 자동으로 되어지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일이 나의 노력 없이 저절로 해소되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몫을 완성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청사진을 그려 놓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미리 대학교 등록금을 위한 적금을 붓고 결혼을 위해서 혼수 예물을 준비해 두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 아이가 실제 대학에 들어가고 실제 결혼을 할 때에 완성되는 계획입니다.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을 유치장 보석금으로 써버리고 결혼하라고 모아둔 돈을 변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으로 써버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투덜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에 대해서 불만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계획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건 우리측의 크나큰 오해에서 빚어지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멈추십시오. 여러분 주변의 탓도 그만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무언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존경

존경은 그가 소유한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존경은 그가 '되어 있는 바'에 따라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외적으로 덕지덕지 무언가를 붙인다고 해서 절대로 존경스러워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재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물건을 지니고 있는지와 같은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서는 그가 지닌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알랑방귀를 뀌겠지만 뒤에서는 그를 욕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타이틀, 기술, 스펙도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어느 전문분야의 최고가 된다고 해도 그 '분야' 자체와 상관없는 이에게는 의미없는 타이틀일 뿐입니다. 시골 할머니에게 관현악단 수석 바이올린 지휘자는 그저 깽깽이 연주자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소죽 하나도 끓이지 못하는 천하에 쓸모없는 놈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지닌 지식과 누적된 경험이 겸손과 더불어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존경이 아니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각각의 전문 분야에서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교수에 대해서 저마다의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존경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권력의 기본 속성은 '지배하는 것'이고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지배하는 이를 존경하고 싶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힘'이 이용되어야 하고 그 힘은 언제나 피지배자의 동의를 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힘에 억눌린 이들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신음하면서 원망과 앙심을 품게 됩니다. 때로는 '관계'를 소유하려고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유명한 누구를 잘 안다는 식입니다. 그 유명한 사람과 친인척 관계이고 사이가 굉장히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존경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