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7월, 2014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과의 인터뷰 2

잘 지내셨습니까 주님 - 덕분에. 하하하. 그냥 하시는 말씀이지요? - 아니야, 나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은 나의 기쁨인걸? 내 이름을 전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감사하게 하는 이들은 모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야. 하지만 넌 조금 더 분발해야겠어. 네,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지요. 그럼 오늘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역 안에 있나요?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사실 창조된 모든 것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긴 해. 하지만 단 하나 내가 엄청난 선물을 한 부분이 있지. 그건 바로 인간들이 지닌 ‘자유의지’라는 거야. 그것만은 내가 놓아두는 거야. 그것을 건드리면 내가 원래 목적한 ‘사랑’도 사라져 버리거든. 목각 인형을 떠올려봐. 그 인형은 자유의지가 없어 그저 내가 움직이려는 대로 움직이 뿐이야. 나는 그런 인간을 만든 게 아니야.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어. 하지만 그 인간들 중에 첫 인간이 나를 ‘거역’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이 들어차야 할 자리에 ‘죄’가 들어차 버린 거지. 내가 아들을 준비시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야. 그렇게 돌아서버린 이들을 다시 끌어오기 위해서였지. 나는 어둠을 만든 적이 없어. 다만 엄청난 선물을 줬을 뿐이고 그 선물을 받은 이들이 그 선물을 이용해서 전혀 엉뚱한 것을 만들어 내었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지. 지켜보신다는 것은 지켜 보시기만 하신다는 것인가요? -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내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있었더라면 이미 이 세상은 멸망했을거야.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자격을 지닌 이들은 아마 하나도 없었을 지도 몰라. 나는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야. 지금도 일하고 있지. 지금도 힘들어하고 고통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어. 물론 반대쪽의 케이스도 보살피고 있지. 지나치게 교만하거나 다른 이를 억압하거나 하는 경우도 그에 가장 적절한 것을 마련해 두고 있어. 그게 뭔가요? - 왜 아는 걸 묻고 그래? 내가...

잊어주는 것

누군가의 잘못을 알고서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잊어주는 것입니다. 마치 상대가 잘못한 일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용서하는 자는 꾸준한 덕을 쌓게 됩니다. 왜냐하면 좀처럼 잊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동안에 늘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을 안고 꾸준히 용서하는 것이지요.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은 변화하게 됩니다. 분명히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해를 당한 상대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다가오는 걸 보면 깨닫는 바가 있게 마련이지요. 많은 경우에 우리가 행하는 불의는 우리의 약함과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용서를 체험하는 사람은 변화하게 됩니다. 그 용서하는 이를 닮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용서를 넘어서서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격이지요. 도리어 상대가 인내한다는 걸 보고는 더욱 달려드는 케이스입니다. 이러한 경우라면 적절한 때에 가르침을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르침은 언제나 온유하고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결국 그들과 우리를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소한 잘못들, 조금 위중한 잘못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용서할 거리들이 넘쳐납니다. 우리가 ‘잊어주는’ 훈련을 계속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내성’이 생겨나서 하찮은 일은 아예 웃어 넘길 수도 있습니다. 이로써 용서하는 이들은 꾸준히 성장하게 되지요. 내면에 인내가 자라고 또 자라는 것입니다.

옛 것과 새 것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새로운 소식’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이는 정말 전에 없던 새로운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도 포장지를 뜯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개월 전에 생산되었지만 이미 제품이 나올때 뜯어서 사용하는 연필보다는 2개월 전에 생산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연필이 당연히 ‘새 연필’입니다. 왜냐면 한 번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의 이유로 하늘나라의 가르침도 ‘새로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들 듣긴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알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그 계명의 본의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하늘나라의 가르침은 여전히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반면, 옛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벌써 익숙해져 있고 익히 실천해 오고 있는 가르침이지요. 그것은 율법적인 사고, 세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즉 어느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죄악을 피할 수 있고, 어느 좋다는 행위를 반복해서 하면 우리의 수준이 올라간다는 식이지요.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스란히 실천하고 있으니 세상 안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지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생 때에 하면 안되는 짓들이 있고, 좋다는 학원을 다녀야 대학에 올라가는 것과 같지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처세술’ 책들에 기술된 내용들은 모두 이런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고 드러내고 있지요. 사실 모두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필요없는 것을 인간에게 마련하시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 둘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단순히 하늘나라의 열정적이고 순수한 가르침에만 치우치지도 않고 반대로 옛 것을 올바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지침을 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싸움

인간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공부를 하는 건 좋은 성적을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심도 깊게 들어가면 근본 방향의 원의가 등장합니다. 거기에서 서로 동의를 하게 된다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대부분의 이유는 서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오해에서 억울함이 생겨나는 것이고 저마다 자신의 이유를 지닌 채로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화하기 전에 상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성이 높아지는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다면 싸울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슬쩍 상대의 마음에 뭐가 들어있나를 보면 되겠지요. 우리의 마음이 꼭꼭 숨겨져 있기 때문에 싸움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이 숨겨져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사랑’이라는 열매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로는 ‘죄악’도 거기에서 자라나지요. 완전히 환하고 투명한 마음만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산다면 죄악이 머물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천국이지요. 서로의 선을 신뢰하고 더 나은 선을 향해서 서로 힘을 모으는 곳이 바로 천국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지옥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로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 해꼬지를 하려는 곳이지요. 상대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그 위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곳이 바로 지옥인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은 과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그건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보물을 볼 수 없는 이유

보물을 보고서도 그리로 마음이 끌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1) 보물이 가리워져 있다. 2)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다. 첫번째로 보물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 이 보물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속이는 자들’이 등장해서 상황이 더욱 심해 졌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엉뚱한 것을 내놓고는 그것을 두고 보물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하지요. 신앙의 본질은 케리그마,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도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신앙의 본질이 여러가지 겉치장으로 몇 겹 둘러 싸이고 나면 전혀 엉뚱한 산물이 나타납니다. 마치 예전에 율법주의자들이 활개를 친 것처럼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굉장히 유사한 이들이 활개를 치지요. 세세한 규정들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이런 저런 신심 행위를 강조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가르침에 얽매이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래서 보물들이 상당히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보물을 사람들에게 열어줄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지요. 둘째로는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질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조였던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물을 바라보고도 엉뚱한 보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탐욕을 고집하지요.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문제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보물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음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유의지로 눈 먼 상태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콜 중독자에게 알콜에서 해방된 삶의 기쁨을 열심히 역설 하였음에도 그에게 선택을 내어 주었을 때에 알콜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빈 공간

성인들이 행한 여러가지 업적들은 ‘빈 공간을 늘려가기’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릇에 공간이 많을수록 들어가는 게 더 많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갈을 담아놓은 컵에 많은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성인들은 하나씩 비워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재물을 비워내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자존감을 비워 내었습니다. 그 밖의 모든 성인들은 모두 자기 나름으로 그 공간을 만들어 낸 셈이지요. 우리는 우리 각자의 공간을 창출해야 합니다. 흉내낼 필요가 없지요. 자신에게 적합한 카리스마가 있게 마련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비워낼 수 있는 걸 비워내야 하는 것이지요. 누가 금욕에 헌신했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 곧대로 따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제단의 봉사자로서 그리고 양들의 목자로서 제 할 일에 헌신하기 위해 나머지 것들을 비워내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심각한 성인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성인을 좋아하지요. 자신이 뭔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일반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뭐든지 죄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모두 좋은 것이지요. 좋은 벗과 술을 한 잔 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함께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나누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절제와 더불어 할 수 있다면 모두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무절제한 것은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도 합당하지 않은 법입니다.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번 들어찬 공간은 쉽게 비워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올바르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비워내지 말아야 할 걸 비워낸다고 애를 쓰다가 공연한 노력한 허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

마르타는 굉장히 활동적인 인물입니다. 여동생 마리아가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고 또 동생이 죽어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도 주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굉장히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인물이지요. 주님은 이런 마르타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 때문에 역정이 났을 때에 주님은 마르타의 이름을 연거푸 두 번 부르시면서 마르타를 애정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도 주님은 그녀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마르타는 기꺼이 신앙 고백을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마치 통통 튀는 공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고 하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일에 열심히 동참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잘 듣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주님이 말씀하실 때마저도 듣지 않고 제 성질을 부렸다면,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타가 제 성질 대로만 행동 하려고 했더라면 아마 마르타는 그저 평범한 여인네로 복음 사가에 의해 기록될 여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활동가였고 그분의 명에 따라서 자신의 방향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의 아픔을 씻어내겠다며 실제로 활동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하나 있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여라.’

이 명을 듣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런 케이스도? 저런 케이스도? 우리는 사랑에 반발하는 중인 것이지요. 왜냐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사랑은 이런 류의 사랑입니다. 상대가 사랑스럽고 아무런 흠도 티도 없어서 절로 사랑이 가는 류의 사랑인거지요. 물론 그런 사랑이 있다면 얼마나 감미롭고 좋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사랑은 그런 환상 속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름다워 보이던 사람도 미워지고 처음부터 못나 보이는 사람도 있고 날 속이려 드는 사람도 있고 아주 나쁜 사람도 있지요. 사랑은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우리의 모든 약점과 한계와 더불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악인에게도 당신의 은총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그들에게 더 많은 빛을 비추어 당신께로 나아오게 만들지요.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우리들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가면서 하느님이 사랑하려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거짓의 분열

미사 독서 가운데 너무나도 길어서 신학생들을 가장 지치게 하는 수산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노인네가 욕정을 품고 그녀를 보다가 그녀가 목욕하는 사이에 나타나서는 범하려 하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자 둘이서 그녀가 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는 내용이지요.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거짓’은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빛은 늘 한결같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마음이 서로 모입니다. 하지만 거짓을 따르는 이들은 마음이 분열되어 있지요. 유향나무와 떡갈나무… 이 두 노인네가 수산나의 음행을 목격했다고 하는 나무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둘의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지요. 거짓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도 일치점을 찾지를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서 생활로는 세상을 찾기가 일쑤이지요. 반면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정말 하느님을 찾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그런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요? 즉, 그렇게 의로움을 드러내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은 걸까요? 아마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이에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밀과 가라지는 같이 자라야 합니다.

시기

시기라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향한 면입니다. 시기는 상대의 좋은 무언가를 보고 부러워하면서 그것이 없는 나와 비교하면서 생기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질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상대를 향한 면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상대의 장점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점으로 인해 상대를 증오하고 파괴하려는 마음입니다. 한 사람은 이 질투를 통해서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지요. 최종적으로 시기가 이루어내는 것은 ‘완전한 분리’인 셈입니다. 나를 파괴하고 상대를 파괴해서 간극을 완전히 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시기는 이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숨겨져 있던 마지막 세번째 국면이 드러납니다. 즉 시기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가능하면 상대를 축복해 주십시오. 상대의 좋은 것에 기뻐할 줄 아는 이들이 되십시오. 

죽음

죽음이라는 현상은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왜 조금 전까지 움직이던 육신이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왜 그의 얼굴빛이 점점 흐려져가고 생기가 사라지는지, 그리고 왜 그는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는지 우리는 수많은 이유를 찾아왔고 그걸 막을 방법을 아직도 연구하고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지요. 인간은 때가 되면 신체적인 활동을 정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전에 없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라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도 바로 ‘죽음’ 앞에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일찍부터 그 답을 제시해 왔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거치지만 실제로는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하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은 죽기 전에 살고 죽고가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육신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죽음’을 말하지만 실제 인간이 죽는 것은 내면이 죽어 버릴 때를 말합니다. 더는 진실을 따를 능력도 의지도 없는 순간부터 인간은 진정으로 죽어버리는 것이지요. 즉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습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혼이 죽어버린 채 육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허망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면이 죽어버린 이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길’로 보내 주셨지요. 하지만 주님 이후 200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죽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부르신 이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9-30) 우리가 알고 있는 아드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신 인간의 예형이었습니다. 그분은 맏이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형제가 될 이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계획된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메세지는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느 형태로든 무리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가족이 단위가 될 수도 있고, 학교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지요. 각자의 무리는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족은 기본적인 생존과 인성을 양성하기 위함이고, 학교는 배움과 친교, 직장은 영리추구와 자기완성 등등이지요. 하지만 이런 세상의 무리들은 그 형태를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잃는 천애고아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는 사람도 있으며 딱히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의 수도회나 사제단이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던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장 뚜렷하게 내적으로부터 건설된 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맏이로 삼는 단 하나의 공동체이지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이 공동체의 목적은 의롭고 영광스럽게 되어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공동체의 존재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 그리고 그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람, 또 알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 알고 그 공동체를 시기, 질투하고 증오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모습의 부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크게는 두 부류 ...

숨어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철저히 모습을 감추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만일 당신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이라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내비치셨다면 아마 우리는 그 영광에 벌벌 떨면서 하느님을 섬겨야 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 순간 자유를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그분의 영광 앞에서 더할 나위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느끼면서 그분에게 순명할 도리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숨어 계십니다. 철저하게 당신을 감추십니다. 심지어는 아무리 거룩해 보이는 살아 있는 성인일지라도 하느님을 직접 뵙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분을 찾고 또 찾아 그분의 온기를 느끼고 스스로의 삶의 모든 부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려고 애쓸 뿐이지요. 하지만 때로 지상의 성인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의 단편들 만으로도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심 역시도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제자들마저도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의심을 품었지요. 하느님은 숨어 계실 것입니다. 아마 철저히 숨어 계실 것입니다. 이 숨바꼭질의 승자는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찾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같이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느님을 찾아 이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도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의 이 간청에 하느님은 무척이나 흡족해 하십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바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백성을 위한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에게 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지혜로운 왕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솔로몬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지혜를 가득히 받은 그였지만 그것이 그를 늘 붙들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그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더 세세하고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방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이교의 신을 섬기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가득히 부어진 은총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받은 은총의 크기만큼이나 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적게 가진 자들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무조건 많이 더 크게 가진다고 행복이 더 커지는 게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모든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합당한 은총을 청하고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랑

사랑의 근원은 같지만 표현 양식은 다릅니다. 모든 이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정직한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아이의 정직함을 잘 가꾸고 살리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아이가 거짓말을 그만두고 진실을 말하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빌미로 도리어 자녀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막아야 할 자녀의 그릇된 습성을 도리어 살린다거나 반대로 키워야 할 아이의 좋은 면을 가로막는다거나 하는 식이지요. 예를 들면, 자녀의 내면에 ‘허영’이 자라고 있는데 그걸 즐기는 어머니는 도리어 그 자녀의 허영이 자라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즉 아이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좋아하고 내면은 공허해져 가는 걸 모르고, 더 외적으로 인형처럼 꾸미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화장하는 걸 가르쳐 주는 식이지요. 반대의 예로 아이의 ‘창조성’을 살려야 할 시기에 부모가 원하는 식의 인생길을 고집하면서 오로지 돈만을 걱정하게 만들어 아이의 기를 죽이고 천부적인 창조성을 말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다른 소박한 일을 하면서 그걸로 충분히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반드시 의사나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어야 하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모든 성적을 극상으로 받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과연 무엇이 사랑일까요? 우리는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실까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전혀 엉뚱한 모습의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를 괴롭힐 것이다 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할 길을 늘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집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지요. 당장 눈 앞에 화려한 것, 듣기에 감미로운 것,...

산티아고 성인

산티아고 성인은 남미에서 유명한 성인입니다. 한국이라면 스페인의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산티아고 성인은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대(大) 야고보’ 성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산티아고 성인, 야고보 성인을 찾는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저 그분의 유명세 때문에만 찾을 뿐 그분이 지니신 진정한 내적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서 안에는 야고보 성인의 일화가 등장합니다. 바로 제베대오의 두 아들들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이지요. 어머니는 자녀들의 ‘안녕’을 주님께 기원합니다. 사실 단순한 안녕의 수준이 아니라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선처해 주기를 바라셨지요. 어쩌면 대부분의 어머니의 마음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들은 청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의 의향을 물어 보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다고, 할 수 있노라고 대답을 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수많은 수도 서원식과 부제 서품식과 사제 서품식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을 지망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마시게 될 잔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고 청합니다. 그저 그 자리의 화려함, 멋짐, 아름다움만을 상상하기 바쁘지요. 그래서 그 모든 과정에 큰 고민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시는 길에 대해서 수차 설명을 했습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금 설명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미흡하지만 그들의 의지를 존중하신 것이고 받아들이신 뒤에 다시 이끌어 주시기까지 하시는 것이지요. 섬김을 받으려는 이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산티아고 성인의 의지를 받아들인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혼자 만의 신앙?

오늘 저녁에는 식사 초대를 받아 한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집 아버지는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저는 누구든지 하느님과 원하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교회의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거기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남기셨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로 일치되어 살아 가기를 바라셨고 성령을 보내 주셨지요. 혼자 하늘 나라에 가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전하기로 하셨습니다. 교회가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비틀거리게 마련이고 때로는 상처가 나기도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누군가 쓰러지면 다른 일어나 있는 이들이 일으켜 주고, 또 그러다가 일어나 있던 사람이 쓰러지게 되면 또 다른 일어나 있는 이들이 도와 주라고 교회를 만드신 것이지요. 정말 자신의 신심이 좋아서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지요. 몇몇 성인들은 기도 가운데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성인도 ‘교회가 필요없다’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더욱 사랑하셨고 존중하고 순명을 했지요. 여전히 교회는 이런 저런 어려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지상 교회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제 혼자 잘났다고 예수님을 찾다가는 엇나가기 쉽상입니다. 비록 교회가 굼떠 느려 터지고 답답해 보이긴 해도 그래도 영 엇나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교회가 가는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저버리지 마소서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지요. 간혹 하느님의 자비를 오버해서 신뢰하는 이들을 만나고는 합니다. 즉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라서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하시고 결국 우리 모두를 하늘 나라로 이끄신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하는 표현 중에 하나는 맞습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잘못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모두를 ‘억지로’ 하늘 나라로 이끌지는 않으십니다. 도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왜 일어날까요? 사실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 닿는 데까지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는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선으로 돌이킬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아가는 순간 인간은 인형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기껏해야 기계 장치를 넣을 수는 있겠지만 인형인 것에는 다름이 없게 되고 말지요. 자기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모두를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게 된다면 그 순간 ‘사랑’도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로지 ‘자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말도 안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럼 선하신 분이 어떻게 ‘악’과 공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것이 선 자체이신 하느님과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대두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니 나쁜 선택을 한 자들, 즉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죽음 이후에는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까지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까지일까요? 이 세상에서 살 동안만 자유의지가 있고 저 세상에 가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죽음을 거치고 나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존재가 될까요? 천국에 있는 이들은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허수아비들일...

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으로 찾는가?’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는 사물을 찾고 귀로는 들리는 음성을 찾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눈은 감기지 않았고 귀는 닫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있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마태 13,15) 그럼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눈과 귀 안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거르는 또 하나의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지요. 성경의 ‘저 백성’은 신앙이 없는 이들,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본다고 생각하고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여행가가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여행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신뢰하는 이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솔직히 받아들여 자신 안에 이런 저런 그림을 그려 보겠지만 신뢰하지 않는 이는 같은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가 하는 이야기가 내면에 받아들여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자들이 듣고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신뢰하는 마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그 안에 더욱 더 희망을 키워 나갔고 그래서 예수님의 지혜를 더욱 더 받아들여 풍요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거부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거부감이 더욱 커져갔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어두운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

시간과 사명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명’입니다. 하지만 그 사명이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들 의견이 분분합니다.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사명이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누구는 사제가 되고 누구는 결혼을 합니다.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행복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내느라 정작 자신의 행복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행복은 그의 것이고 나의 행복은 나의 것이니까요. 그는 그대로 행복할 자유와 권리가 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각 인간에게 모두 알맞는 틀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같은 아버지를 모신 같은 집안의 형제 자매들이라는 것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집안 자녀가 아닌 다른 집 자녀들이 있기는 합니다. 성경의 ‘가라지’로 표현되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행복은 남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결국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걸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행복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행복이 기원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선하신 뜻이었고 당신을 찾는 모든 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바로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 일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어느 하나로 귀착될 수 없습니다. 노래를 좋아하면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이웃들을 초대하고, 글을 잘 적으면 자신이 적는 글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강연을 잘 하면 자신의 강연으로 그렇게 합니다. 저마다 각자가 가진 재주로 하느님을 열심히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다른 집...

따스함

아침부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추위까지 더해서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침대에서 나가기도 싫은 날이네요. 향초 하나를 선물 받아서 늘 켜 두고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방을 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도 담아서 말이지요.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는 더운 동네라서 기본적으로 ‘보온’이라던가 ‘온열기’ 등의 개념이 좀처럼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정도 추위가 다가와도 온 몸을 감싸고 난리가 나지요. 우리야 가벼운 잠바 하나면 끝날 것을 이 사람들은 모자, 목도리, 장갑에 완전무장을 하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지요. 그네들의 집은 집안이나 집밖이나 온도 차이가 없는 셈입니다. 믿을 거라고는 자기 체온 뿐이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치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호할 수단이 우리가 가진 열 뿐이라면 그걸 꽁꽁 싸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이고, 우리가 ‘소유한 것들’에 더욱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몸을 덥힐 여지가 있다면, 즉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우리는 때로는 추위에 좀 떨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곁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엄청난 난로라서 우리가 언제라도 다가서면 우리의 따스함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잃은 자들이 온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따스함을 등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필요한 열기를 나누어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꽁꽁 싸인 마음도 절로 열릴 것입니다.

섭리

종이 한 장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자 여러분, 이 종이는 언제부터 떨어진 것일까요? 분명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종이는 여전히 저의 손에 들려 있고 저는 이 종이가 떨어졌다고 말하면서 그게 언제부터냐고 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이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을 했지요. - 종이는 아까 질문하는 순간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이는 이미 제가 종이를 바라보고 이 종이를 가지고 예시를 삼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떨어져 있었던 셈이지요.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말에 참으로 당황하고 황당해 합니다. 아무도 죽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에 질투와 증오가 가득하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말 의도를 강하게 품고 있었던 것을 미리 보셨던 것이지요. 수많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교리실의 한 반의 학생들은 여전히 별 일 없이, 별 탈 없이 잘 지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평화롭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인 셈이지요. 예비된 문제들이 수두룩 한 것입니다. 결국 그 반에서 아이들에게 ‘추후’ 일어나게 될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그 반을 담당하는 교리 선생님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면 그 반의 학생들은 모두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일어나야 할 불운한 일들이 아이들에게 모두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본당에 오면서부터 이 공동체를 하느님께 이끌 마음이었고 성경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앞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저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저를 불러주신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하느님은 태초부터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이끌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

잃어버린 것

“신부님은 무엇을 잃었을 때 가장 마음 아팠어요?” 오늘 성경강의에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글쎄, 예전엔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잃으면 참 마음 아파했지. 왜냐면 내가 가진 물건들에 대한 집착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마음은 점점 사라져갔고 세상 물건들이란 모두 잠시 지니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걸 알았지. 사실 우리가 물건을 지닐 때에는 그 물건 자체의 가치보다 우리가 덧붙여놓은 가치가 붙게 마련이야. 가령 이 연필은 얼마 하지 않아. 우리가 이 연필을 잃으면 다른 걸 사면 그만이지. 하지만 만일 이 연필을 누가 선물해 준 거라면 거기에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붙이는 셈이야. 그러면 이 연필을 잃으면 슬퍼하게 되겠지. 결국 우리는 주변 사물들에 우리의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려 드는 셈이야.” “신부님 물건이 아니라 다른 건 잃었을 때 슬픈 적 없어요?” “음… ‘신뢰’야. 믿던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지. 정말 믿고 신임했는데 배신할 때… 아마도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육신도 아프셨겠지만 그분을 더욱 아프게 한 건 바로 사람들의 냉담한 마음이었을거야. 제자들의 배신도 그렇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적은 없어요?” “할머니를 떠나보냈지. 하지만 의외로 그 사건은 별로 ‘잃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오히려 같이 사는 사람들 중에서, 지금 현재 이 세상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마음을 달리 가지는 사람들이 더욱 가슴 아프지. 즉 우리가 모두 함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서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말야. 세상에 온전히 빠져서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그 사람을 ‘잃는’ 셈이지. 그래서 우리는 할 일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돌이켜야 하니까 말야. 그러니 날 좀 많이 도와주길 바래. 알겠지?”

부유한 두 집

어느 마을에 부유한 두 집이 있었습니다. 그 두 집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한 집 주인은 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집 주인은 도끼를 소중히 여겼지요. 가난한 다른 동네 사람들이 이 두 부잣집에 아무것도 모르고 물건을 처음 빌리러 갔다가 삽을 빌릴 때에는 삽을 소중히 여기는 그 집에서 삽을 빌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된통 구박을 당하곤 했고 도끼를 빌릴 때는 도끼를 소중히 여기는 그 집에서 도끼를 빌리기는 커녕 된통 구박을 맞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삽이 필요하면 삽을 소중히 여기는 집으로 가면 안되고, 도끼가 필요하면 도끼를 소중히 여기는 집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을 말이지요. 반대로 삽이 필요하면 삽을 기꺼이 내어주는 집에 가야 하고 도끼가 필요하면 도끼를 기꺼이 내어주는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선호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서 그걸 눈치채게 됩니다. 어느 사목자는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되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멋모르고 찾아가지만 나중에는 사목자의 선호도를 파악하게 됩니다. 어느 신부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야기만 하고 영적인 이야기를 거의 꺼려 한다는 것, 반대로 어느 신부님은 영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는 무심하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제각각의 신부님을 찾아가게 되고 그 신부님들은 그 분야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더욱 늘리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오는 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저 내내 ‘용돈’만 달라고 칭얼대는 자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녀에게 ‘동반자’가 되는 부모님이 아니라 경제권만을 쥐고 흔드려는 부모님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동반자라는 삽을 아끼는 부모님이었지요. 그리고 차라리 돈을 주는 게 쉬웠던 겁니다. 반대로 자녀가 고민이 있을 때에 부모님을...

택시 회사 축복식 강론

택시 회사 축복식 강론 저 오늘 여기 왜 부르셨어요? 살떼냐(국물 있는 남미식 고로케) 주실려구요? 축복 받으실려고 부른거죠? 좋습니다. 드리지요. 제 영대의 색깔 보이시나요? 이 색깔은 어디를 통해서 받아들여질까요? 그렇지요. 눈이지요. 제 눈은 비록 작지만(ojo de chino) 다 본답니다. 제가 하는 스페인어는 어디를 통해서 들어가지요? 입을 통해서 들어가나요? 그렇지요. 귀를 통해서 들어갑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축복’은 어디로 들어갈까요? 그렇지요. 축복은 마음으로, 영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축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공인된 가톨릭 사제이니까요. 문제는 여러분들이지요.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축복이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답니다. 제 앞에 두 병이 보이시죠? (PET병 두 개가 있었습니다.) 이 두 병의 구멍은 같은 크기니까 들어가는 축복도 같습니다. 하지만 한 병의 윗부분을 잘라 입구를 넓히면 들어가는 양이 달라지지요. 만일에 한 사람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다면 더 많은 걸 받을 거구요. 마찬가지랍니다. 축복은 모든 이에게 전해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준비에 의해서 더 많이 받기도 하는 거지요. 그럼 축복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축복은 마음으로, 영혼으로 받는다고 했지요? 영혼이 축복을 받으면, 실제로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의 마음이 바뀝니다. 즉 그가 전에는 술을 마시고 엉망으로 살았고 매 금요일마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독신자의 날(Día de soltero)’을 즐겼지만 축복을 제대로 받고 나면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지요. 술을 왜 찾을까요? 그것이 기쁨이기 때문에 찾습니다. 육신의 기쁨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뿐입니다. 왜냐면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싫어하고 아이들은 엉망이 된 아빠를 보면서 울기 쉽상이지요. 그러면 결국 이 사람은 술로 몸의 즐거움은 얼마든지 누리겠지만 결국 영혼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는 셈이지요. 축복을 받으면 한...

영적인 의미의 가족

영적인 의미의 가족 수많은 가치들, 덕들은 사실 가정에서 자라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학교에서 지식으로 배울 수는 있어도 생활로써 배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이미 가정에서 그러한 것들에 길들여져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기도라는 행위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가르쳐 줍니다. 즉, 아주 어린 시절부터 두 손을 모으고 촛불 앞에서 기도하게 하면서 자연스레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되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사랑을 가득 담아서 그분들이 누구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부모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성장합니다. 단순히 몸과 지식이 큰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삶을 따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지요. 도움이 필요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선’을 배우고 수다스럽지 않고 늘 정직한 어머니를 보면서 ‘진리’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내와 양보’라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가정 안에서 배우게 되는 이러한 가치들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도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회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모에게 가치들을 배운 아이들은 마땅히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같은 가치를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방치해 두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잘 자라기를 바란다면 그만한 착각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때로는 그러한 싹들이 자라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뿌린 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가정이라는 화분을 덕행의 물을 주어 잘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가끔씩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보스의 신임을 가득히 받던 이가 크나큰 실수를 해서 이제는 직분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면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고는 보스에게 간청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볼까요? 뭐 여러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일단은 침상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그때에 가서야 우리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때에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모든 희망이 꺼지게 되는 그 날, 돈도, 명예도, 미모도, 건강도 소용이 없게되는 수명이 다하는 그 날에 과연 우리의 내면에는 어떤 의욕이 남아 있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라는 기회, 이런 기회들이 모이고 쌓여서 우리의 생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기회들을 허투루 쓰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 더 이뻐지려고, 조금 더 유명해지려고, 조금 더 부유해지려고 기를 쓰다가 생을 소비해 버리고 말지요. 아침 햇살을 제대로 누려 본 적도 없고,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소를 여유있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아내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함께 해 줘서 고맙다는 말 한 번 못해 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하느님을 알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 그 아름다운 구원의 기회를 우리는 수도 없이 놓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이기적인 신앙생활, 나의 안녕만을 꾀하는 신앙생활만을 위해 달려오다가 그 어떤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누워있는 마지막 침상이 아무리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지고 그 집이 3층 집이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가지고 갈 것은 그러한 물건들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선행들일 테니까요. 거지를 보고...

자신의 뜻

자신의 뜻 인간이 내면으로 싸우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로 종합됩니다. 나의 뜻을 그분의 뜻, 즉 하느님의 뜻에 우선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세밀한 부분들을 분별할 필요가 있지만 그래도 큰 줄기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첫 조상 때부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다가 큰 화를 당했고 그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싶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나의 올바를 위치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사랑’을 수확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복종은 있을 수 있어도 강제된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엉뚱하게 쓰여지기를 바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규율을 마련하셨지요.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어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둠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놓았을 뿐입니다. 즉 보석함과 쓰레기통을 만들어 두셨을 뿐이지요. 하느님은 합당한 틀을 만드신 것 뿐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석이 되면 보석함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 쓰레기가 되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적지 않은 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쓰레기로 살다가 보석함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법칙들을 개발해 냅니다. 즉, 자신은 보석이 아니고 쓰레기인데 보석처럼 겉꾸며서 보석함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가 힘있는 자들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이들이 하느님의 뜻마저 좌우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듭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생각하신다고 가르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가르치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하느님의 뜻은 사실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이들이니까요. 여러분의 내면을 솔직히 ...

미사를 무시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함…

교회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 사제인 저 자신도 압니다. 왜냐면 저 자신에게서부터 수많은 오류들을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게을러서 기도도 걸르기 일쑤이고 맛있는 거, 더 좋은 것을 향하는 마음을 때로 주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제가 이러한데 다른 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수시 때때로 어두운 모습,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실망한 그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서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도 무시하고 내던지기 일쑤라는 것이지요.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로 '미사'를 안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야 뭐가 되었던 환경상으로나 조건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혹시 주일 내내 일을 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부터가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그 주일미사의 의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대상들은 본인 스스로의 변덕으로 미사를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미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기꺼이 그런 선택,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제안은 어떻습니까? 차 한 대를 두고 그냥 공짜로 선물을 해 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그 차에 실린 쿠션에서 냄새가 난다고 그 차를 선물받지 않겠다고 우겨대는 사람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차의 가치를 무슨 장난감 자동차처럼 생각하고 쿠션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쿠션 하나 때문에 기꺼이 차를 마다하는 셈이지요. 미사의 은총은 훗날 우리가 미친듯이 찾아 헤맬 대상이 될 것입니다. 미사는 '연극'이 아닙니다. 사제 혼자 주절거리면서 겉보기 번지르르한 무슨 행위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제의 인격을 빌려 거행하시는 거룩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