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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의 근원은 같지만 표현 양식은 다릅니다. 모든 이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정직한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아이의 정직함을 잘 가꾸고 살리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아이가 거짓말을 그만두고 진실을 말하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빌미로 도리어 자녀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막아야 할 자녀의 그릇된 습성을 도리어 살린다거나 반대로 키워야 할 아이의 좋은 면을 가로막는다거나 하는 식이지요.

예를 들면, 자녀의 내면에 ‘허영’이 자라고 있는데 그걸 즐기는 어머니는 도리어 그 자녀의 허영이 자라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즉 아이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좋아하고 내면은 공허해져 가는 걸 모르고, 더 외적으로 인형처럼 꾸미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화장하는 걸 가르쳐 주는 식이지요.

반대의 예로 아이의 ‘창조성’을 살려야 할 시기에 부모가 원하는 식의 인생길을 고집하면서 오로지 돈만을 걱정하게 만들어 아이의 기를 죽이고 천부적인 창조성을 말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다른 소박한 일을 하면서 그걸로 충분히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반드시 의사나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어야 하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모든 성적을 극상으로 받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과연 무엇이 사랑일까요? 우리는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실까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전혀 엉뚱한 모습의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를 괴롭힐 것이다 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할 길을 늘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집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지요. 당장 눈 앞에 화려한 것, 듣기에 감미로운 것, 입에 달콤한 것만을 찾아 헤메고 다닌 셈입니다.

이제는 마음을 돌이켜야 할 시간입니다. 참된 사랑을 찾아 나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공허해 했고 마음 아파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렇지 않으니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줍니다. 사랑은 완성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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