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독서 가운데 너무나도 길어서 신학생들을 가장 지치게 하는 수산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노인네가 욕정을 품고 그녀를 보다가 그녀가 목욕하는 사이에 나타나서는 범하려 하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자 둘이서 그녀가 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는 내용이지요.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거짓’은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빛은 늘 한결같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마음이 서로 모입니다. 하지만 거짓을 따르는 이들은 마음이 분열되어 있지요.
유향나무와 떡갈나무… 이 두 노인네가 수산나의 음행을 목격했다고 하는 나무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둘의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지요.
거짓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도 일치점을 찾지를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서 생활로는 세상을 찾기가 일쑤이지요. 반면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정말 하느님을 찾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그런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요? 즉, 그렇게 의로움을 드러내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은 걸까요? 아마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이에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밀과 가라지는 같이 자라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거짓’은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빛은 늘 한결같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마음이 서로 모입니다. 하지만 거짓을 따르는 이들은 마음이 분열되어 있지요.
유향나무와 떡갈나무… 이 두 노인네가 수산나의 음행을 목격했다고 하는 나무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둘의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지요.
거짓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도 일치점을 찾지를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서 생활로는 세상을 찾기가 일쑤이지요. 반면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정말 하느님을 찾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그런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요? 즉, 그렇게 의로움을 드러내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은 걸까요? 아마 진리의 빛 안에 사는 이에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밀과 가라지는 같이 자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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