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9-30)
우리가 알고 있는 아드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신 인간의 예형이었습니다. 그분은 맏이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형제가 될 이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계획된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메세지는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느 형태로든 무리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가족이 단위가 될 수도 있고, 학교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지요. 각자의 무리는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족은 기본적인 생존과 인성을 양성하기 위함이고, 학교는 배움과 친교, 직장은 영리추구와 자기완성 등등이지요.
하지만 이런 세상의 무리들은 그 형태를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잃는 천애고아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는 사람도 있으며 딱히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의 수도회나 사제단이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던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장 뚜렷하게 내적으로부터 건설된 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맏이로 삼는 단 하나의 공동체이지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이 공동체의 목적은 의롭고 영광스럽게 되어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공동체의 존재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 그리고 그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람, 또 알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 알고 그 공동체를 시기, 질투하고 증오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모습의 부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크게는 두 부류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과 그 반대의 물러나는 사람이었지요.
하느님이 정하신 것은 분명히 당신의 이 공동체가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를 만드셨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상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시작부터 ‘정해진’ 것이라곤 없는 셈입니다. 물론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의 그 공동체에 들어가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지요. 오로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자들만이 듣고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드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신 인간의 예형이었습니다. 그분은 맏이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형제가 될 이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계획된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메세지는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느 형태로든 무리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가족이 단위가 될 수도 있고, 학교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지요. 각자의 무리는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족은 기본적인 생존과 인성을 양성하기 위함이고, 학교는 배움과 친교, 직장은 영리추구와 자기완성 등등이지요.
하지만 이런 세상의 무리들은 그 형태를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잃는 천애고아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는 사람도 있으며 딱히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의 수도회나 사제단이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던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장 뚜렷하게 내적으로부터 건설된 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맏이로 삼는 단 하나의 공동체이지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이 공동체의 목적은 의롭고 영광스럽게 되어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공동체의 존재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 그리고 그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람, 또 알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 알고 그 공동체를 시기, 질투하고 증오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모습의 부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크게는 두 부류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과 그 반대의 물러나는 사람이었지요.
하느님이 정하신 것은 분명히 당신의 이 공동체가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를 만드셨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상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시작부터 ‘정해진’ 것이라곤 없는 셈입니다. 물론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의 그 공동체에 들어가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지요. 오로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자들만이 듣고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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