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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무시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함…


교회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 사제인 저 자신도 압니다. 왜냐면 저 자신에게서부터 수많은 오류들을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게을러서 기도도 걸르기 일쑤이고 맛있는 거, 더 좋은 것을 향하는 마음을 때로 주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제가 이러한데 다른 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수시 때때로 어두운 모습,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실망한 그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서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도 무시하고 내던지기 일쑤라는 것이지요.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로 '미사'를 안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야 뭐가 되었던 환경상으로나 조건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혹시 주일 내내 일을 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부터가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그 주일미사의 의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대상들은 본인 스스로의 변덕으로 미사를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미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기꺼이 그런 선택,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제안은 어떻습니까? 차 한 대를 두고 그냥 공짜로 선물을 해 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그 차에 실린 쿠션에서 냄새가 난다고 그 차를 선물받지 않겠다고 우겨대는 사람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차의 가치를 무슨 장난감 자동차처럼 생각하고 쿠션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쿠션 하나 때문에 기꺼이 차를 마다하는 셈이지요.
미사의 은총은 훗날 우리가 미친듯이 찾아 헤맬 대상이 될 것입니다. 미사는 '연극'이 아닙니다. 사제 혼자 주절거리면서 겉보기 번지르르한 무슨 행위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제의 인격을 빌려 거행하시는 거룩한 희생제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길을 열어준 은총의 잔치인 셈이지요. 우리가 훗날 육신을 벗어나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은 이 제사에서 거저 나누어지는 은총의 빵의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의 눈은 닫혀 있고, 그 원인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쿠션의 냄새는 원래부터 났던 것이고 앞으로 더 날 수도 덜 날 수도 있습니다. 사제라는 쿠션에서 냄새가 나지 않으면 '동료 신자'라는 쿠션에서 냄새가 나던가 '수도자'라는 쿠션에서 냄새가 날 것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지상의 순례자들이고 거룩한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모쪼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눈을 열어 미사의 본래적인 가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축복 하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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