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1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미움 받을 용기

사람은 사실 사랑받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생존하는 것이 육체의 본능이라면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상은 다릅니다. 이 세상은 원죄 이후로 사람들의 죄와 어둠이 누적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도 쓰레기를 치울 필요가 없지만 쓰레기가 있는 곳에서는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우는 수고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 어떤 영적인 쓰레기도 없는 곳이기에 모두가 기쁘게 생활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다른 상황입니다. 이곳에는 영혼의 쓰레기가 존재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존재하고 악의와 격분, 증오와 원한이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명을 나누어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이 내어놓는 악의 결과물을 자신의 영혼 안에 담아 치워내는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를 치운다고 표현하면 참 좋은 일 같지만, 쓰레기를 치운다는 것은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과 활동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자연스레 그들의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받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무죄한 이들을 피해자로 삼고 또 의로운 이들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순둥한 사람,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악에 맞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모든 세대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언제나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고 나서야 그들의 무덤을 꾸미기 시작합...

일하기 싫어하는 자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뭔가 엄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시고 가만히 있지 말고 몸을 놀려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일에 매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달린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면 그 엔진의 힘이 무슨 소용이고 그 차의 온갖 성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비록 차는 보잘 것 없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게 도와주는 차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일에 대해서 올바른 묵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서 일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자기 양식을 버는 일'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사실 우리가 바치는 주임의 기도 안에서도 '양식'이 나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우리는 매번 기도합니다. 그 양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이 말하는 양식은 단순히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이 아니라 영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양식을 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그곳에 온 이들을 먹이기 위해 분주히 애쓰고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 발취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양식을 벌고 있는 이는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순간은 바로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양식을 버는 일이 됩니다. 비슷한 예로 성당에서 전화받는 이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급한 전화는 성당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무질서한 삶'이 됩니다. 세상에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없습니...

거만한 자들 / 악을 저지르는 자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이들입니다. 거만함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이 됩니다. 마치 비가 내리면 높은 곳을 피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거만함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모든 거룩한 은총의 선물들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또 자신의 외적 열성을 한껏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사람들에게 칭송을 얻고자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짓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는 악의 속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하다는 이들을 단죄하시고 반대로 어둠의 구렁에 빠져 있는 이들을 곧잘 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아닌 것을 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고 죄를 짓고 있는 이들을 세속적 칭송으로 꾸며주곤 합니다. 악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아무리 짐짓 거룩해 보인다 한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내면 속에 탐욕과 악의가 가득했지만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외적인 탈의 힘을 빌어 스스로 거룩한 사람인 양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물하고 그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는 일련의 일들 속에서 그들이 사실은 선을 추구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내던 여인은 아주 훌륭한 표본입니다. 그들은 선을 추구하던 이들이었고 결국 그 선을 선물받게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거만한 이들과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 즉 그들의 악의 근원이 되는 존재인 사탄도 함께 처단될 것이고 가지, 즉 그들에게서 뻗어나가는 악의 소산들도 모두 처분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

그들의 생각

  다음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생각의 단편입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당연히 바로 끌어내야지요. 그건 나의 이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화해의 제물로 소나 한마리 잡아다가 하느님 앞에 바치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일 것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저 환자를 형제라고 할 지 몰라도 나에게 저 환자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고 또 당신 예수라는 작자는 지금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밉보이고 있소.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의 양심을 찌른단 말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이요. 그뿐만이 아니라오. 가능한 기회만 있으면 당신의 약점을 파고들어 당신을 로마에 고발해서 로마의 권력으로 당신을 망가뜨리고 파괴시키고 싶소.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오. 우리는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 따위에는 관심없소. 우리는 당신 양이 아니니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느님이 좋소. 부자에게 축복을 주고 가진 부를 더욱 늘려주는 하느님이 좋단 말이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즐기는 사제들을 좋아하오. 우리가 주는 돈을 받으면서 싱글벙글하고 우리의 귀에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축복의 말을 던져주는 사제가 좋단 말이오. 당신이 하는 것처럼 아무것에도 기댈 곳 없는 고아와 과부, 불치병 환자를 돌보는 하느님 따위는 우리는 필요없소.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사실 돈이 하느님이오. 그래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생기면 그 즉시 반응하고 신경을 쓰지만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이 원하고 바라는 것 따위는 크게 관심 없소. 그러니 그만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 우리에게 모욕이 되는 말은 하루빨리 집어 치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