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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잃을 것이 없는 분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9-30 옛날 맥가이버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오는 순간입니다. 주인공은 모든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맥가이버칼 하나로 뚝딱뚝딱 위기를 헤쳐나갈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고장난 차도 수리하고 심지어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만들어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쾌재를 외치곤 했지요. 예수님의 적대자들,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화가 엄청 났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불러 일으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 그들은 화나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좋지 않다는 소식이 남편이 담배를 끊기를 바라는 자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반대로 담배를 아직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가신 이야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했고 진리의 친구들은 그 말씀을 즐기지만 반대로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는 이를 증오하고 거부합니다. 가능하면 진리를 외치는 그 목소리를 없애고 싶어서 모든 수단을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 들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그들이기에 그들은 사람을 죽여도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필요하다면 낙태도 하고 필요하다면 안락사도 종용하고 사형도 찬성하고 하느님이 주인이신 생명을 말살하는 데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이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

눈먼 자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 23,17) 육신의 눈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뜨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눈을 감아서 하루 생활해 본다면 우리는 눈이 먼 상태의 불편함을 바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눈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영혼의 눈이 감겨졌는지 아니면 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육신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혼의 눈이 감겨 있다면 영혼의 불편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우리는 영혼의 눈의 상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0-23)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갈라 5,19-21) 이런 일들에 빠져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눈은 멀어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너무나 자주 또 특별히 유혹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탐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탐욕을 신앙적인 자리에까지 끌고 들어와 아주 교묘한 가르침으로 변질시킵니다. 즉 마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인양 탐욕스러운 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격이 바로 복음에 나오는 성전과 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6절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이로 인해서 그들이 실제로 따르고 있는 주인이 드러나고 결국 가치관이 역전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역설

하느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임과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역설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헌신적'이라는 말은 피로의 누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은 자비롭고 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과를 뽐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타인을 눌러야 내가 올라서는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경쟁구도' 속에 들어 있고 한정된 자원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이보다 먼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누릴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버스에 한정된 자리가 있고 먼저 올라서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성경은 '타인을 위한 헌신'을 가르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와 성경의 구원에 후한 하느님의 사고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자 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열심히 일했으니 타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은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애좋은 형제는 서로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에 서로 축복을 전해 줍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지요. 마치 동생의 좋은 일이 형의 좋은 일인양 기뻐하고 반대로 형의 좋은 일은 동생이 그 영광을 입은 양 기뻐해 줍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내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와서가 아니라 나의 형제가 구원의 대열로 함께 들어서는 데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설명은 했지만 이러한 '공동체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