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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15의 게시물 표시

바라는 것을 얻기

무엇이 기쁜 일일까요?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면 기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원했고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을까요? 어린 시절 저는 장난감이 그토록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가격이 엄청났고 내가 받는 용돈이라는 것은 겨우 동전 몇 푼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댄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로 장난감 가게에 가서 그토록 사고 싶던 기차를 샀습니다. 기뻤지요. 그렇게 원하던 걸 손에 넣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기쁨이 거짓 기쁨이었던 것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이 사라진 걸 안 부모님이 눈치를 채게 되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내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장난감 기차가 나에게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부모님은 어찌된 일인지 물었고 죄악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길에서 돈을 주웠다고 거짓말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나에게 쏟아지게 되었지요.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는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것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구할 정당한 수단을 강구하도록 하시지요. 장난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을 구할 정당한 수단이 없는 이상 참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순히 세상 것만을 원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것을 원하고 얻고를 반복해 가면서 그러한 것들이 결국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는 체험을 확고히 하고 그 뒤로부터는 보다 드높은 가치를 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실과 정의, 사랑, 용서, 인내와 겸손과 같은 가치들이지요. 어린 시절의 생존 본능에 따른 우리의 기본 욕구에서 조금씩 벗어나 영적으...

영적 의사

자기 상처를 건드린다고 ‘나쁜 의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사탕 발린 말을 하면서 정작 치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만 뜯어가는 의사를 나쁜 의사라고 할 것이지요. 하지만 영성적인 면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정으로 치유할 마음이 있는 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피하고 반대로 자시들의 귀에 달가운 말만 해 대면서 정작 아무것도 내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이를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환자가 치료를 하지도 않은 의사를 분별하려는 것부터가 재미난 일입니다. 환자는 병이 다 낫고 나서야 그 의사가 정말 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치유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단순히 자신의 느낌만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해 버리고 거리를 두니 치유는 커녕 병은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의지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기 싫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에 관계된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세상에 물들어왔으니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익숙하고 쉬운 일입니다. 헌데 그런 습관에 사로잡힌 우리가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두고 기도를 시작하려면 엄청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를 영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하고 흔히 하는 말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이키는 행위를 말하지요. 의지를 쏟아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영적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단 낫고 나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니 그 다음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개선되고 나면 마치 우리가 전에는 패스트 푸드 음...

목자의 사랑

사랑받으려는 마음은 아주 정상입니다. 하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하기에 슬픔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 다른 사랑을 갈구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사랑은 모두 한계점을 지니고 있지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밖의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상이 하느님과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인간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에게 다가가 직접 그분의 사랑을 수액을 받아 마시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길은 좁고 온갖 난관이 가득한 길이라 걸으려 하는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사랑에 주린 영혼을 채워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느님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도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이들은 막연히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찾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에 더욱 상처받는 것입니다. 목자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목자를 통해서 다른 여느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가 사랑을 뿜어주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목자에게서 남다른 사랑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제에 대한 사랑의 기대치가 큰 이유입니다. 사제가 적어도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사랑이 오염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사랑 한다는 핑계로 ‘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랑의 기대치가 역으로 작용해서 목자를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랑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 사랑이라는 것도 늘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요. 하물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은 그 한계점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언뜻 상대를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한 선을 긋게 됩니다. 특히나 상대가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매력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선은 더욱 확고하게 드러나지요. 상대의 미모가 좋았다거나 상대의 성격이 좋았다거나 상대가 가진 특정한 장점 때문에 매력을 느껴 다가온 사람은 그 매력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정반대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매력을 지닌 다른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마음이 그리로 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상대에게 좋은 성격을 기대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상대가 모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을 사는데 일부러 값 떨어지고 못난 상품을 구입할 멍청이는 없으니까요. 그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을 고르는 셈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돈의 한계도 바라보는 것이지요. 악마는 이런 그의 약점을 알기에 그것을 파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매력을 느낄 것을 언제나 눈앞에 제시하지요. 그것을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혹은 사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우리 내부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사탕으로 꼬실 수는 없습니다. 사탕을 간절히 바라기에 사탕을 주면서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면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언제나 세상적인 어떤 매력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지요. 사람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는 곳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

롯 이야기

롯의 이야기는 죄악이 가득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의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의인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죄인들이 가득한 그 고장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가는 같이 재앙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미련을 남기면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화염이 떨어진다거나 누군가가 소금기둥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넓힌다면 비슷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요. 어느 공동체가 그릇된 선택을 하고 그 방향성이 도저히 수정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의인을 살리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물론 의인은 그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이미 최선을 다 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도 의롭지 못하며 나아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신경질만 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는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십니다. 그에게 천사를 보내 다가올 재앙을 경고해 주시지요. 이 초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고 어느 사람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의인은 보다 참된 길을 찾기 위해서 여정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사실 수많은 성인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모두 성인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성인들은 하느님만을 바래서 나아가고자 했고 사람들은 그런 성인들의 모습을 무시하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요. 그런 방해 속에서도 성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때가 다가오게 되면 성인은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자신의 길을 가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이는 이 세상에서 특수한 사명을 ...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달콤한 사탕이 아닙니다. 쓴 약이고 사람을 살리는 약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대변됩니다.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본질에 접근해 갈수록 저항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과 공동체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의 시기는 얼마 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고 시간이 갈수록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게 됩니다. 죄인들의 공동체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지요. 아마 시간이 더 흐른다면 더 많은 오류들을 관측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환상도 깨어져가게 마련이지요. 사제나 수도자의 뒷담화를 듣기 시작하면 상당히 진전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별로 세부적으로 다르긴 하겠지만 전체 줄기는 비슷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사실 하느님이 모르시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복음 구절에서 여러가지로 이에 대한 말씀을 남겨 두셨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청소를 할 수도 있지요. 결국엔 저마다 자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을 적용하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 책임이 아니다’며 떠나기를 선택하지요. 그러는 동안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청소다’라며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떠나는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다른 더러움입니다. 사실 교회 안의 문제는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의 단편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그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보다 강하고 영리한 사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아직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청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점점 더 덜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더 힘든 청소를 도맡을 수 있게 되지...

주님의 인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사도 12,7) 때로는 인생 행로에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막막한 지점에 이르는 체험을 합니다. 잘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틀어막히는 것이지요. 사업이 실패한다던가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이럴 때에는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형제는 순교를 당하고 자신은 감옥에 갇히고 수갑을 차고 더는 오고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든 구속에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해야할 일과 따라갈 길까지 하나하나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베드로에게는 아직 남은 사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를 늘 보살피십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구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에 충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설령 더는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에게 쓰임새가 있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나를 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잔뜩 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내가 이룩하기를 원했던 것을 잔뜩 해 온 터라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에 그 누구에게도 희망을 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면 행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엾게 보시고 구해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황금의 정련

- 신부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한 학생이 울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 황금이 더욱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불이 필요한 법이야. 네가 보기엔 신부님이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니? 하하. 신부님도 나름 시련이 많단다. 다만 그걸 공연히 드러내서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킬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지 않을 뿐이야. 그러니 너도 너에게 다가오는 시련들을 잘 견딜 수 있게 되길 바래.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야. 하느님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지.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 4,7) 이 세상의 삶이 언제 끝날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 생의 마지막 시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곤 했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자신의 때가 차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위의 말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힘이 빠집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을 다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위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7) 모두가 바오로 사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열성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방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 영혼 안의 수도꼭지처럼 ‘은총’을 쏟아부어 줍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본래 가진 특성대로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르타는 마르타대로,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자신이 가진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할 수 있게 도와주지요.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구일 뿐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술을 마시는 미성년자들

며칠 전 뉴스에 우리 동네 이름이 나오면서 청소년들이 모여서 한 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완전히 취해서 경찰이 와서 데려가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녀석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그러고 있었다고 전하더군요. 경찰은 술을 누가 판매를 한 것인지 조사를 하고 부모들에게 아이들 심리 상담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개선되었을까요? 저로서는 상당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성실히 학교를 다니고 부모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어울려 진탕 취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자신들이 지금 하는 행동의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지요. 일단은 그런 행위를 그치도록 가로막기는 해야 하겠지만 과연 그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그 ‘욕구’가 어떻게 잠재워질지 저로서는 의심스럽습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욕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요? 욕구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든 저든 무언가를 원하게 마련이지요. 다만 그 욕구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하느님에게 다가서야 하고 보다 거룩한 것을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대뜸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의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욕구가 처음 방향을 설정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에게 칭찬을 받아서 좋아하는 아이가 그 칭찬의 대상이 자신이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쁜 악세사리 때문인지에 따라서 향후 더욱 칭찬받고 싶어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꾸중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냥 어른이 짜증이 나서 꾸중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잘못해서 정당한 질책을 듣는 것인지 아이는 알고 있지요.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도 내면의 방향이 형성되는 셈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의 욕구는 길들여질 수 있...

친구

어린 시절... 동네에서 게임기 가진 친구는 가장 행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친구를 게임기와 대화하지도 못하고 서로 웃지도 못하고 그저 그 게임기를 부러워하며 달려드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느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보듬을 줄 아는 친구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삶에서 배운 진리이다. 단순히 어떤 기호로 모여든 친구들은 그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 우정도 무너진다는 것을 배웠다. 여전히 세상에는 저마다 자신이 최고의 친구라고 내세우는 존재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매력을 다 발산하고 나면 반대로 우리를 얽어맬 존재들이다. 그래서 술은 친구가 될 수 없고, 돈도 친구가 될 수 없다. 우리를 진정 친구로 초대하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어 배우기 스페인어 사이트

한국어 배우기 스페인어 사이트 Vemos en la imagen de arriba un mapa de la península de Corea con la división del territorio en dos partes, la del Norte, cuya capital es Pyongjang y la del Sur con capital en Seúl. Tan sólo 200 kilómetros de mar la separan de las islas de Japón estando unidas por el norte con el continente Chino. Si miramos otro mapa, veremos que hay algunas diferencias y lo mismo ocurriría si cogiéramos un tercer mapa. etc. Lo que sí se puede apreciar en el mapa de la derecha es que el río Han atraviesa la capital Seúl por la mitad y así la veríamos en una vista aérea, una ciudad dividida por un río que a su paso por Seúl tiene un kilómetro de anchura y es navegable, quedando unida la ciudad por más de una veintena de puentes. Pero no es esto lo importante que vamos a mencionar en esta página, que la vamos a dedicar al lenguaje coreano. Corea se lee en romanización española Janguk. Lenguaje se lee Mal, por lo que Jangukmal significa lenguaje coreano. Coreano también se pu...

불멸의 인간, 죽음의 인간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지혜 1,13) 하느님은 절대로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원동력이며 모든 것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한 이들을 다시 당신에게로 돌이키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시지요.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두려움은 죽음에 속한 이들의 몫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씀씀이와 말과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잘 자신의 정의를 내세웁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가장 정의롭다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타인을 공격하기가 일쑤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지요. 정의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지혜 1,14-15) 죽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에게 적대시하는 존재에 의해서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속한 이는 그것을 언젠가는 맛보아야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지혜 2,23-24) 죽음에 속한 자들, 죽음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들,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싸우고 무례하고 참을성이 없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열매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이 원래 인간을 만든 목적 그대로 ‘불멸’하게 됩니다.

회당장의 딸과 우리의 영혼

회당장의 딸의 이야기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회당장의 딸은 죽어있다시피 한 우리의 영혼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때로 내면이 공허하고 마치 죽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큰 죄에 빠져 있거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러한 느낌을 받지요. 그러한 때에 회당장 딸의 아버지는 주님을 찾아갑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우리의 몸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데려갑니다. 습관이고 버릇이 된 셈이지요. 비록 내면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살리고자 하는 막연한 마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아버지, 즉 우리의 몸이 주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엉뚱한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 같습니다.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삽입된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건드렸지만 그 누구도 주님의 은총을 얻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었던 그 여인만이 주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지요. 매 주일마다 수많은 이들이 성당에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은총을 얻는 이는 오직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 뿐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수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의 기회가 열려 있고 또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실 기회가 열려 있지만 결국 주님의 용서를 얻고 은총을 얻는 이는 간절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사실 거의 다 구경꾼들일 뿐이지요. 주님이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다시 길을 가려는데 사람들이 와서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자고 하지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도착을 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소위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이의 죽음을 슬퍼한답시고 사람들이 모여 와서 온갖 소란을 피우고 있었지요. 이에 예수님은 아이가 아직 죽은 게 아니라고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빈정댑니다. ...

보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기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할 수만 있어도 겸손해 질 것입니다. 하지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본다고 생각하면서 더 많은 오류를 빚어내게 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어 둘 다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사랑에 대한 영적 시야가 열리지 않으면 매서운 칼날로 모든 것을 재단하게 마련입니다.

동성애

남자가 여자가 서로 좋아한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이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고,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입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성적 욕구를 느낀다. 여자가 여자에게 성적 욕구를 느낀다. 동성애라는 것은 같은 성을 지닌 사람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두고 표현하는 말입니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의견이 서로 갈립니다. 이를 단순히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단순한 차이와 같은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정상인과 정상인의 기능에서 어느 부분이 부족한 장애인의 차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윤리적으로 옳은 일과 그른 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혼동스러워하고 있지요. 이것이 단순한 차이일 뿐이냐, 한 측은 정상이고 다른 한 측이(여기서는 동성애자) 조금 부족한 차이이냐, 아니면 윤리적으로 그릇된 것이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여기에 과격하고 심각하게 반발하는 이들이 개신교 신앙인들이지요. 그들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모든 일에 강력한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레위 18,22-25; 로마 1, 24-27; 1코린 6,9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먼저 이성애자들의 삶부터 스스로 반성하게 하고 싶습니다. 동성애자들에 관한 일들이 화두가 되지만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이성애자들의 측이기도 합니다. 이혼률은 급증하고 있고 파괴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또 그 와중에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먼저 이성애자들의 관계부터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

악에 맞서는 신앙인의 자세

모든 것이 좋고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마음껏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정직하고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힘껏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부터 분리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선을 향한 추구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이고 못된 마음입니다. 그럼 왜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단순화 시키지 않으신 것일까요? 당신의 전능으로 우리가 선한 일만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만’을 하도록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선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악한 일을 할 가능성 자체가 틀어막혀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더는 선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가 ‘선과 악’의 기로에 서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선을 향해서 노력함으로써 그 선이 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닐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요. 그럼에도 우리의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알겠는데 왜 하느님은 악한 이들을 정돈하시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만 당신이 직접 일하시지 않을 뿐이지요. 하느님은 세상에 만연한 악을 위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어 퍼지고 있는 악을 치유하기를 바라셨지요. 그렇게 해서 악한 이들이 다시 뉘우쳐 돌아오게 하고, 또 그만한 노력을 쏟는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합당한 상급을 내어주고자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사람마다 다양한 옵션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나에게 주어진 핵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신앙 공동체의 목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신앙인은 자신이 맡은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이끄는 말씀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이사 30,21)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고집스럽게 그 말씀을 거부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게 하시고 그 길을 따라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나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들이라 하느님의 뜻과는 동떨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손에 쥔 과자를 다 먹지도 않고 동생의 과자를 욕심내는 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심입니다. 동생이 과자를 빼앗겨 울어도 내 입안에 가득 차 있는 과자를 느끼면서 쾌락을 탐하는 모습이 바로 이기적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살펴보는 과정이 없이 그저 내가 원하니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이 충분한데도 더 향락적이고 쾌락적인 음식을 찾아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먹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방향을 더욱 세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본질적인 죄’에 빠져들고 맙니다. 먹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맞지만 온갖 향락을 누리려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위입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로멘스’라고 변명하고 있는 중이지요. 실제로는 그 대상에 엄청 고착화되어 있으면서 말입니다. 하느님은 좋은 것을 마련하셨고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귀를 기울이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보다 참되고 바른 것으로 초대하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우리 ...

신앙과 생존

신앙은 먹고 사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과 동떨어져 일하는 사람 이 둘은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면은 완전히 다릅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주인이 보건 말건 상관이 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재능으로 사회에서 맡은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겠지요. 그것이 주님의 뜻이니까요. 그래서 늘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진실하고, 선하고, 공정합니다. 그런 이를 자신의 일꾼으로 삼고 있는 주인은 든든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이지 않고 늘 성실하고 책임있게 일을 해 나가는 것을 보고 더 중요한 직무를 맡길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과는 동떨어져 일하는 사람은 사실 일하기 싫어 죽을 지경인데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인이 오면 영리하게 그 앞에서는 상냥하고 싹싹하고 심지어는 비굴한 모습까지 보이겠지만 주인이 떠나가고 나면 그 본심이 드러나겠지요. 언제나 주인의 뒷담화를 하고 최대한 일을 적게 맡으면서도 돈은 가장 많이 벌 궁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거짓은 기본이겠지요. 하느님 따위 아무 상관이 없으니 거짓말을 잔뜩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목적(적게 일하고 많이 벌기)을 채우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인에게 그것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지니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고 말겠지요. 신앙은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내적 가치는 세상의 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효율성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결국 일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 사람은 단순한 기계 부속이 아닙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그 안에 게으름이 가득하다면 아무 소용 없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학공부

신앙을 공부한다는 말은 신앙 지식을 습득한다는 말로 대치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리교육이 많은 경우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믿는 바를 실천해보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것을 ‘학문’으로 변질시켜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 버리면 신앙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은 존재하기 힘든 법입니다. 가장 기초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삶으로 온전히 숙지하지 못한 채로 배움의 장소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은 기초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서 사람들의 신앙 지식에 대한 요구도 갈수록 더 해박해지고 신학을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을 다 외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일자 무식한 할머니도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써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공허한 말잔치로 더 고급 지식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집을 튼튼한 바위 위에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 박사 학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안에 형성된 진실한 믿음, 구체적인 일상으로 드러나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유형 3가지

1) 단체1. 어느 정도 부유하고 명예가 있어서 갖출 걸 다 갖추고 있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는 이들. 그냥 남들이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그만인 단체. 추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단체. 신앙은 옵션의 일부일 뿐이며 실제로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단체. 2) 단체2. 일상 가운데 신앙을 실천하며 사는 단체. 때로는 길을 엇나가고 때로는 쓰러지지만 주님께 기댈 줄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서 다시 일어서서 제 갈 길을 가는 단체.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단체. 3) 단체3. 뭔가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단체. 특히 단체1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서 그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단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본질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단체. 분열, 분파를 조장하고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단체. 제가 지켜본 바로는 이런 특징들을 꼽아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일의 중요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 있는가 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을 만들어내서 몰두하곤 합니다. 종이 비행기를 어떻게 접을지를 두고 친구와 한참을 고민하기도 하고 잡은 개구리를 다시 놓아줄지 조금 더 가지고 놀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그 시절에 했던 고민들이 참 쓸데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고민은 훗날 돌이켜보면 그때는 왜 그랬을까 하게 될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일들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우정을 키워 나가고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것은 어른이 되어 바람직한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일이었으며 또 힘들었지만 학교 숙제를 꼬박꼬박하고 열심히 배워 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참으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영원’에까지 이르는 것이지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일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 두가지 핵심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흘러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일에 착수하지 않는 이상 대기업 회장이 되어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도, 세기의 미녀가 되어도 소용이 없는 셈이지요. 영원히 남을 일에 착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공연한 일에 정신을 판다고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고는 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정작 아픔에 신음하는 이웃을 돌보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그럼 그 의사 직분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행복의 근거

우리는 무엇에 행복을 느낄까요? 유원지를 가서 비싼 입장료를 내고 값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과 어울리는 시간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하면서도 서로가 행복을 추구하는 관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행복의 핵심은 보다 본질적입니다. 인간의 근본으로서 행복에 사로잡힐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헛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공허를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음식은 먹는 그 순간은 행복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순간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실과 선과 정의에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꾸준한 행복의 근원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말초적인 행복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보다 본질적인 행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찰나적인 행복은 미래의 불행을 예비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좋아 보이지만 그것을 잃게 될 두려움도 커지는 것이지요. 잘생긴 사람은 못생겨질 두려움으로 괴로워하고, 인기가 있는 사람은 인기를 잃을 두려움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잃을 수 없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행복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역경과 시련을 당할수록 더욱 순수해지는 희망이지요. 이를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장사

“신부님 사무실에 좀 와주실래요? 한 분이 신부님을 뵙고 싶어하는데요.” 사무장이 저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겠다고 하고 가 보았습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저는 콜롬비아 사람입니다. 저희는 가정 성화를 위해서 헌신하는 그룹입니다. 저희는 얼마 전에 와르네스의 본당에도 갔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보여드리는 이 성화를 미사 후에 나눠주려고 합니다. 가정 기도문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의 사진도 함께 나눠줄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가가 담긴 시디도 나눠주려고 합니다.” 사실 처음 볼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헌제나 서두가 길거든요. 그래서 그러시냐고 하고 본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저희가 제작한 성경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만이 아니라 거의 매년 오는 이들입니다. “저희 본당에는 성경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성경강좌를 하지요. 성경은 읽으라고 있는 것이지 장식하라고 있는 건 아닙니다. 원한다면 사람들이 충분히 싼 가격에 본당에서 성경을 구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님의 성경은 굳이 저희 본당에서는 판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이들은 본당 주임 신부님의 호감을 사서 허락을 얻어서 그 추천으로 값비싼 성경을 판매하려는 이들인 셈이었지요. 그들이 판매하는 성경은 크기도 엄청 크고 상당히 비싼 가격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가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교회의 권위를 힘입어 평소에는 팔 수 없을 물건을 쉽게 팔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만일 제가 하라고 허락을 한다면 주임 신부님도 허락하고 추천한 제품이라면서 사람들에게 호객 행위를 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지요. 이번 주일에 신자들에게 본당에 성경이 싼 값으로 잔뜩 있으니 사서 읽으라고 권해야겠습니다.

감수성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 안에 ‘꺼려지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착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안락을 추구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증오하고 미워할 때에 나로서는 가슴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고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마치 성인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성인들에게는 누가 욕을 해도 비난을 서슴지 않아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마치 로봇 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인간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욱 충실히 해 나갈수록 우리의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보다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죄악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에게는 ‘공감하는 능력’이라던지 ‘연민의 마음’과 같은 것이 무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타인을 살피는 마음이 무디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다 본질적인 신앙생활에 충실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을 깨닫게 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더 많은 고통들이 마련되겠지만 그만큼의 사랑도 커져갈 것입니다.

영적 수준

다양성의 차이와 수준의 차이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모두 같은 모양새는 아닙니다. 저마다 다른 특성과 기질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들은 초등학생들입니다. 대학생들은 초등학생들과는 수준이 다르지요. 그래서 대학생이 초등학생 흉내를 내어볼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지는 못합니다. 삼촌이 와서 조카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 수는 있지만 조카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회적으로 맡은 책임이 있고 또 그에 상응하는 위신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초등학생은 대학생이 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요. 개강 등록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수업을 듣는 것은 더더욱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수준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양한 이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도에 헌신하고 다른 누군가는 묵상에 헌신하지요. 그런 다양성들이 모여서 더욱 풍성함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준의 차이는 극복되지 못합니다. 수준의 차이에 있어서 높은 수준의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이런 저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열심히 돕고 그들 가운데에서 생활하셨지만 반드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은 과연 어떠할까요? 사실 여기에는 다양한 지표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은 실제적으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초등학생이 원소 주기율표를 달달 외운다고 물리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학자는 실제로 물리에 대한 전반적인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있을 때에 물리학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영적 지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수준으로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친구도 필요없이 자기 혼자만 사랑하는 이기...

비유

성경강의를 마치면서 질문을 하라고 하니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지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상세히 가르치셨으면 더 좋았을 걸요. - 비유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도구입니다. 환히 드러내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비유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씨를 뿌리는 모습이 너무나 흔한 모습이었기에 거기에서 비유를 끌어쓰신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오늘날이었다면 스마트폰을 비유로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유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행여 제가 컴퓨터에 대해서 잘 안다고 CPU의 구조와 프로그래밍 작업을 비유로 들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타게 되는 미끄로(미니 버스를 지칭하는 말)와 그 운전기사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잘 이해할 수 있지요. 비유는 사람들에게 뜻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그들의 삶에서 비유를 뽑아 내셨습니다. 다른 한 편, 비유는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고 하느님에게 관심있는 이들을 분별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비유를 듣고는 그 의미를 궁금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추구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 비유는 미지의 것, 자신이 늘상 체험하는 그냥 일상의 이야기로 남아있게 되지요. 성경 말씀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거룩한 내용들, 영원에 관계된 내용들은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을 분별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마구 던져줄 수는 없지요. 가령,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총독 앞에 섰을 때에 사람들은 ...

속이 상하는 이유

어떤 사람이나 일을 마주하고 속이 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속이 상할까요? 어찌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에 의문표를 붙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곧잘 속상해 하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니까요. 속이 상하는 여러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 대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에 내가 그 기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런 문제가 주기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 수 있는 것이라면 크게 속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과 일들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이 문제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나라를 마련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선하심으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지요. 그리고 저마다의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제 길을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각 사람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좋게 작용을 합니다. 심지어는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마저도 실은 축복의 순간이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 그분이 가르치는 길과 반대 방향을 걷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반대로 작용을 합니다. 그에게는 가장 좋은 지상의 축복도 실은 재앙의 전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컨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에게는 훗날 재앙으로 작용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결국 속상함, 거슬림과 같은 것들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좋게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가능하다면 부정적인 생각은 떨쳐버리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혹자는 묻습니다. ‘그럼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그의 구원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

권위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태 7,29) 권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권위를 정복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는 물흐르듯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참된 권위가 없는 이는 다른 이를 ‘정복’하려고 하지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대를 억지로 내리눌러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힘을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그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글을 배울 능력이 없고 법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이들을 자신이 가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지배하려고 했지요.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법으로 정치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권력으로 경제인들은 돈으로 같은 일을 실행합니다. 결국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는 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참된 권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는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작용을 합니다. 여성들이 미모에 대해서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미모’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일종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갈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의 인기가 사회적으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절로 그 권위 아래 순종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억지로 내리누를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겸손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을 하고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면모를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진실성이 있었고 그분은 사람들 사이를 거닐면서 당신을 차별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특별한 힘을 느낄 수 ...

인터넷방에 가는 아이

본당 복사단 한 꼬맹이가 인터넷방(우리나라로 치면 PC방)에 가는 맛을 들인 모양입니다. 헌데 문제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엄마가 속이 상한 모양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엄마에게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인터넷방을 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니 무턱대고 아이를 제어하려고 하지 말고 아이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맑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거짓말을 하려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없지요. 거짓말은 ‘두려움, 공포’가 원인입니다. 아이는 옷을 벗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옷을 벗고 다니는 것은 사회적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고 그 뒤로부터 알몸으로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인터넷방에 가는 아이가 그것을 엄마에게 숨기는 데에는 다양한 배경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인터넷 방에 가는 것을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기고 숨기고 싶어한다는 것이 첫번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가 왜 그것을 수치스럽게 느끼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음 단계로 왜 엄마에게 그것을 숨기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필시 엄마의 행동에도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엄마는 아이와 대화를 좀처럼 시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급한 불을 끄느라고 서둘렀겠지요. 심하면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자신의 욕구는 상당히 강한데 그것을 엄마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없으니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교육 수단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고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시도하는지 살펴야 하지요. 나아가서 인터넷방에 가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 되지는 않는다는...

은총을 얻기

개념 이해를 잘 해 봅시다. 우리가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은 어디까지 스스로 은총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은총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은총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합시다. 은총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은총은 0%입니다.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이 허락하실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시는 것이지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부모로서는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때로 자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가 마냥 이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자녀가 온갖 악의로 부모에게 대적하고 욕을 쏟아 붓는데도 선물을 줄 리는 없습니다. 나아가 그 자녀가 그 특별한 선물이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내어 놓으라고 고집을 피운다고 그것을 줄 이유도 없지요.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아옵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은총을 선사하십니다. 부모된 도리로서 자녀들에게 삶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삶은 우리가 특별히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정해진 수명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지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고 언젠가는 생을 다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 생의 바탕 위에 당신의 특별한 은총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 특별한 은총이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것 하나와, 또 우리가 내어 놓으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주어지지도 않는다는 것 둘 입니다. 1) 자신의 생을 엉망으로 가꾸면서 자신이 얻어낸 특별한 자격증 따위로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리라고 착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 성전에 봉헌물을...

반석 위의 집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4) 사실 이 말씀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실제로 해 보면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 이론적인 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마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만으로는 아프리카에 가서 없이 사는 아이들의 똥구멍도 닦아 줄 수 있을 법 합니다. 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내 옷에 묻은 얼룩 하나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어 누릴 수 있는 내면의 가치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실행되어야 합니다. 인내를 이론으로만 10년을 배워도 사소한 성가심 하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들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수십년째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십자가 지는 것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순시기 연극으로 십자가를 한 번 져 보았다고 십자가를 진 걸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나의 의지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서는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고 가장 험한 산에 등반할 수도 있지만, 집안에서 소파에 누워 있다가 아내가 물 한 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벌컥 화를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십자가는 바로 그 물 한 잔을 가져다 주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반석 위에다 집을 지어가는 사람처럼 됩니다. 착실히 자신 앞에 주어지는 십자가를 꾸준히 져 나가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해도 평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튼튼한 기반 위에 집 한 채 지어보지 않으실랍니까?

불법을 일삼는 자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마태 7,23)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이는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무엇이 불법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주일미사도 잘 지키고, 교무금도 잘 내고, 판공도 빼먹은 적 없고, 금육도 잘 지키는데 과연 무엇이 불법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법’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법인지 모르고 있지요. 법은 문자로 적힌 그 내용들이 법이 아닙니다. 참된 법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에 합당한 모든 것이 ‘법’이 되고, 반대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불법’이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 보이시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팔을 휘젖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 됩니다. 그분은 너무나 크시고 영원하신 분이라 인간의 하찮은 이성이 감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인가요? 천만에요. 하느님은 이런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 안에 등장한 인물이지요. 당신의 외아들이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의 뜻은 단 두 가지 뿐입니다.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기,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이 두 가지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밝혀졌습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느님의 뜻을 채운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식별의 과정

속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어린이와 어른의 반응은 다릅니다. 어린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갑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 순수함으로 인해서 상대의 내면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되면 국회 의사당의 지붕이 열리면서 거대 로봇이 나온다고 하면 정말로 믿어 버립니다. 지극히 피상적인 단계의 이해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어른들은 상대가 하는 말의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누군가 말한다고 그것을 곧이 곧대로 듣지는 않습니다. 한번의 검토를 거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때로는 심정이 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 사이에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을 진심으로 하는지 건성으로 하는지 알아차리게 되고 그로 인해 기분나빠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내면을 어느정도 읽어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영적 식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상대의 외적 표현을 듣고 그 내적 의미를 식별하고 나면 영적으로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영적 식별에서 모든 것은 비로소 본래의 위치를 찾게 됩니다. 상대의 좋은 의도로 전해지는 좋은 표현들은 ‘감사’로 자리잡게 되고, 반대로 상대의 못된 의도로 전해지는 나쁜 표현들 마저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훈련’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저마다의 쓰임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식별을 올바로 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지만 나쁜 것은 피하고 멀리하려는 것이 보통이지요. 나쁜 것을 통해서도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마치 단 것만을 어린 아이가 쓴 약을 먹이려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시선을 넓히기

보는 시선을 넓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간단한 예로 한 사람이 술을 토할 정도로 마시는 것은 그 순간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토하려고 또 다음날 머리가 깨어지도록 아프려고 술을 마시는 건 아닙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을 즐기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다는 욕구가 지나쳐서 육체의 한계선을 넘어 알콜을 집어 넣다보니 결국 토하게 되고 다음날 머리가 깨어지는 것이지요. 그가 조금이라도 멀리 바라보는 시선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함부로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선을 더욱 넓히면 '영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현세의 사정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는 세상에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지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사물들과 그 결과물들에 취해서 거기에만 집중하고 보다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지요. 시선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술에 만취한 뒤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것처럼 세상에 만취해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 영원하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 모두가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결국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영원하신 분을 사랑하게 되고, 영원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상태

우리는 현재 우리의 구원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선호도를 보면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명이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것이 부담감이나 거리낌으로 다가오고 심지어는 혐오스럽기까지 하다면 나는 분명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이 명하시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지고 한없이 사랑스럽다면 나는 그분에게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내가 백두산 위에 있는 특별한 약초를 얻고 싶은데 걸어올라갈 힘이 지금 당장 모자란다면 천천히 그 힘을 기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힘이 넘쳐 흘러도 그 약초를 얻으러 갈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내면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나의 육신이 약해서 자꾸만 넘어진다면 조금씩 노력해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외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 는 것처럼 꾸미고 다니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주님의 명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다. 헌데 내가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오직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온 세상을 재조정하고 싶을 뿐이라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고 상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순간 나의 내면에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위선이나 가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의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이지요. 거기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지닌 것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것을 일순간에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기 까지는 상당한 의지적 선택을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모든 이의 내면을 잘 알고 계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당부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여러 번 난리도 겪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터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라. 너희는 법정에 끌려갈 것이며 회당에서 매를 맞고 또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우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마르 13,5-10) 우리의 지상에서의 사명은 ‘복음 선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이 마지막이 아님을, 앞으로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속이는 자들은 이미 나타나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또 이 사건이 일어나고 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세계적으로 전쟁도 일어나고 있고 지진도 일어나고 있으며 흉년으로 시름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에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를 맞기도 하고 권력가들 앞에서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마지막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오직 전능하신 분께서만 아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남은 사명을 채우면 됩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다가와도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단순히 성당으로 와서 종교생활을...

세례자 요한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요. 그는 사막의 은수자로 살아왔으며 가장 금욕과 극기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회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다가오실 주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낮추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간은 자신을 이겨내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을 스스로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인 셈이지요. 함께 살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고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거슬러서 광야에서 홀로 외로이 투쟁하며 모든 편안함을 내던져 버린 인물이 바로 요한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요구를 단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남김없이 지켰을 것은 누구나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것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외아들의 사랑이 가장 완벽한 율법을 수행하던 이를 월등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의 세례 이후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온 성령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일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으로 그를 충만히 채우신 것입니다. 누가 더 나은 신앙인인가를 따지고 들 때 흔히들 자신이 행하는 극기를 자랑하게 됩니다. 남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신앙의 드높음을 드러내려고 하지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율법적 충실도가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

거룩한 것들 개에게 주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뭐고 개들과 돼지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자동차인가요? 루이X똥 핸드백일까요? 과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단연코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어도 소용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상 생활은 누구에게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거룩하고 소중한 진주와 같은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내어주게 될 개들과 돼지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영혼을 망쳐버릴 수 있는 대상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내어주었을 때에 그 영혼의 본래의 목적대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반대로 영혼을 망쳐버릴 대상들을 말하지요. 그럼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어둠의 영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영혼들을 사냥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어둠의 기회를 찾아 다니는 영혼들이 그 사냥 대상이 되겠지요. 죄 지을 기회를 찾는 영혼들 남들을 속이고 자신의 영혼을 어둠 속에 더 깊이 집어넣을 궁리를 하는 영혼들 주변에서 그들이 더욱 깊은 어두움에 빠져들 수 있도록 그들을 유혹합니다. 어둠의 영들에 사로잡힌 이들도 같은 일을 수행합니다. 평화를 모르는 이들,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서로 갈라지게 만드는 이들은 성령을 받기는 커녕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이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함부로 내어 맡기면 안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우정을 맺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어둠의 길로 이끄는 이들과 ‘우정’을 빌미로 함부로...

절제와 인내

지난 주일 저녁미사때에 청년들에게 한 말이 기억이 납니다. - 음식이 언제 제일 맛있는지 아니? 바로 배고플때야. 우리의 욕구가 존재하고 그것이 채워질 때에 우리는 행복해지는거지. 배가 부르면 더는 배고픔이라는 욕구를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더 쾌락적인 음식을 찾게 되는거야. 너희들이 서로 사귀는 것도 마찬가지야. 너희 때의 적절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지. 젊은 시절에 사랑하는 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건 좋은거야. 하지만 모든 것을 미리 체험해 버리려 한다면 너희들은 쾌락에 사로잡히게 되는거지. 신부님도 너희 만한 때에 여자친구를 사귀어 봤어. 어떻게 하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볼까 고민하곤 했었지. 그리고 서로 손이 닿는 날이면 그 짜릿하고 황홀한 기분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어. 헌데 여기는 어때? 아예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다 입고 다니지. 텔레비전만 켜면 여성들이 비키니를 입고 레이나 데 만사나(사과 여왕, 우리나라로 치면 미스 능금, 또는 능금 아가씨), 레이나 데 치꿍구냐(치꿍구냐 여왕)이라며 온갖 타이틀을 붙여서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지. 그러니 자꾸만 더한 쾌락을 찾게 되는거야. 절제를 배울 줄 알게 되기를 바래. 하느님이 여성들에게 생리 주기를 준 것은 남성들이 그 주기를 존중하고 참을 줄 알게 되기를 바라셨던 거야. 왜냐면 남자들은 매일매일 성욕이 넘쳐나니까. 여성들의 임신 주기를 잘 알고 서로 존중해서 인내하다가 부부 사이에 기쁨을 맛보기를 바라신 거지. 하지만 쾌락만을 추구해서 매일같이 관계를 갖다가는 결국 질려버리고 더 나은 쾌락을 찾게 되는거야. 불륜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이기도 해. 절제와 인내를 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알겠지?

고통

육체적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하면서 치유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 수단이 없으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적 고통이 왜 야기되는지를 올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간이 나빠지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폐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그가 스스로 행한 악습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결과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인내하고 치유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정신적 고통은 물론 외부의 동기가 작용하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나친 걱정과 근심으로 우리 스스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같은 외부의 동기를 지니고도 오히려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두고 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를 향한 분노의 마음을 꺼내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 미워하는 사람을 두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려고 노력하면서 인내를 기르고 또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적 고통은 하느님을 잃어서 괴로운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번째 고통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잃고 사는지 함께 사는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 영혼의 고통이야말로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몰고 오는 바탕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이 공허한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육신과 정신의 쾌락을 찾는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술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엉뚱한 질병과 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공연한 호기심으로 정신적 만족을 얻으려다가 엉뚱한 가르침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면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그냥 하늘을 바라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심각한 일들은 거의 영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합니다. 그들은 스마트폰...

다툼을 피하는 방법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창세 13,8-9) 우리는 공연한 싸움에 휘말려들곤 합니다.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공연히 서로를 경계한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곤 하지요.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노리고 비판하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세상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가령 남미 볼리비아에는 사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아무리 못난 사제라도 미사만 드릴 수 있고 성사만 줄 수 있다면 하다 못해 한 달에 한 번 신부님이 방문하셔서 미사를 드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공동체들이 수두룩합니다. 평신도들도 본당 안에서의 일에 너무 집중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시선을 넓혀야 합니다. 한국은 아직 선교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해주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너무 집중을 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소홀히 하기 일쑤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평화를 제안합니다. 상대가 가고 싶은 곳을 가면 자신은 그가 가지 않는 곳을 가겠다고 합니다. 누군가 으뜸이 되고 싶어하면 우리는 낮은 이가 되면 됩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면 되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으려고 하는 곳에 가면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는 이유는 너도 나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자리는 세상이 ‘좋다’ 하는 자리입니다. 더 높고 더 뛰어나고 더 의미있는 자리를 찾지요. 다툼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아무도 우러러보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일상의 중요성

우리의 일상의 행위는 마냥 초라해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상을 헛되이 보냅니다.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위대한 일은 하나씩 준비되어 온 것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슈퍼 히어로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 충실히 준비되어 온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쳐다보던 군중들 중에 한 사람이 용감하게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헌데 그가 나오면서 씩씩대며 하는 소리가 “누가 나 등떠밀었어?!!!”라고 했다지요. 그냥 피식 거리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여기에도 생각해 볼 거리는 존재합니다. 그가 등을 떠밀린 것은 ‘계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헌데 그는 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 올 정도의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그런 일상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 역시 빠져 죽고 말았겠지요. 우리의 일상은 튼튼한 기반을 마련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무엇에 신경쓰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가는 것이지요. 매일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수다를 떨고 공연한 일에 시간을 보내면서 어쩌다 찾아간 성체조배실에서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상을 온통 어지러운 소음으로 채워 놓았으니 성체 앞에 가서 일시적으로 침묵한다고 해서 그 침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미사에 참례해도 자꾸 분심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향한 공경과 갈망을 일상 안에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 미사를 가도 평일 미사를 가도 맹숭맹숭한 느낌일 뿐입니다. 오히려 반대인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술자리를 갈망하는 남성들은 늘 그런 자리를 물색하고 기회를 만들려고 하지요. 배가 고파서 음식을 찾는 게 아니라 보다 새롭고 감각적으로 미각을 자극하는...

교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인간으로부터 존재의 여부를 의심받긴 하나 실제로 존재하는 분을 의심한다고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권한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권한을 지극한 자비와 사랑으로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반드시 훗날에는 정의와 공정을 남김없이 실현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흠없이 보여주신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에게 봉헌하는 이상은 그분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든 것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영, 외아들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 역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능력과 권위를 전해줍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교회)의 권한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지니는 권위는 다른 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권한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교회, 성령을 가장 잘 받아들인 교회가 가장 큰 권위를 지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여러가지 의견들이 난무합니다. 저마다의 교회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내세우고 또 심지어는 교회 따위는 필요없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머리로 하는 당신의 몸, 당신의 지체를 이루셨지요. 그것이 교회의 핵심 개념입니다. 교회의 구체적인 상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세부적으로 알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모습은 마땅히 원하신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모습, 스승이신 분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발을 닦는 모습이어...

세월호 1년 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마르 4,38) 시간이 흐르긴 했고 다른 사건들이 새로이 터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 상에서 뜨거운 감자인 사건은 단연코 ‘세월호’사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과 정부의 무능한 대응 앞에서 사회는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그 순간만의 일이 아니라 정부를 향해서 쌓여온 사람들의 불신과 분노가 크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은 대중매체의 흐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누구나 원하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덕에 은밀한 곳에서 진행되던 일들이 하나씩 둘씩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의 전에 없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건이 터진 거지요. 그 이전까지도 여러가지 정치권의 비리는 있었지만 그려러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무죄한 아이들이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 정부를 보고 ‘이러다간 죽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셈입니다. 결국 배 안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해줄 만한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교회’가 있었습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늘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준 교회의 그늘에 와서 힘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교회는 저마다의 구성원들의 역량대로 실천적인 면에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걸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 차이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사회 일에 참여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는 사회와 분리된 존재일까요? 과연 이에 대해서 교회는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의 단점은 사라지고 장점은 부각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의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은 부각되지요.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살인자 아들을 지니고 있어도 그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그저 불쌍한 한 인간이 보일 뿐이고, 반대로 세상을 구한 장군이 눈 앞에 있어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아내의 눈에는 온갖 결점 투성이의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증오’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곧잘 상대의 결점을 들추어내고 서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심판대 앞에서 침묵하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가장 공정한 심판관으로 내세운 로마의 총독은 ‘진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뜻 손을 씻는 행위로 자신의 무결함을 드러내는 듯 했지만 결국 군중을 두려워하는 한 초라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드러날 때마다 인터넷은 화끈 달아오르면서 많은 이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모두 그렇게 공정하고 정의로울까요? 그들의 생각에 오류는 없을까요? 그들은 모든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꿰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랑’이 뭔지 모르고 예수님을 만나서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을 사람들입니다. 언뜻 정의를 위해서 심장이라도 꺼내 줄 것 같은 열의를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진정으로 헌신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사고 활동은 극도로 고조되어 모든 일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처신하지만 실제로 가장 필요한 영원에 대한 지식은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을 통해서 단련되고 수련되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

심판하지 않기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화가 나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심판을 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 해결된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판결을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내면으로 누군가에 대해서 심판을 끝마쳤고 그에 대해서 세상에서 사라 없어져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깊이까지 생각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보면 화가 나는 것이지요. 악행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하느님에게 맡기자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극악한 죄를 지은 이의 생명을 바로 앗아 가지 않는 것은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여러가지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에 ‘영원’에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이 부당한 분이라고 함부로 생각하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의 때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고 심지어 최후의 심판의 때도 알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헌데 그런 하느님에게 역정을 내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성숙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만 합니다. 심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에 대해서 그 어떤 분별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고, 누군가가 나쁜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준엄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다만 심판하지 말라는 것은 그의 영원에 대한 결정을 미리 내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가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마지막 연민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성공

세상에서 유일한 성공은 나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뜻을 남김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 성취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하느님의 뜻은 많은 이들에게는 가려져 있고 심지어 그것을 찾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성취를 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이 정말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닌 세상이 좋다고 해서 가는 길인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가 나오고 민생을 살피지 않는 정치인이 나오게 된다. 하느님의 뜻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머무는 시간과 자리에서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그 뿐이다.ㄷ

선상설교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마르 4,38) 너희는 죽게 된 게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했다. 너희는 나와 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늘나라의 새로운 삶을 꿈꿔야 했다. 하느님이 허락하셔서 이 풍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너희는 그것으로도 감사드릴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너희는 두려워했고 이는 믿음이 없다는 표지였다. 너희는 아직도 너희의 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지나가 버리고 말 이 생을 사랑했지.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그토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르쳤는데 너희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의 자녀들아. 나의 아버지는 너희를 위해 아름다운 것을 마련하셨다. 너희는 죽지 않는다. 너희는 나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거라. 오히려 나날이 너희의 기쁨을 넘쳐 흐르게 하여라. 나의 이 생의 마지막에 내가 수난 당하고 죽어서야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 돌아올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온전히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 그때부터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더는 너희의 생을 보전하기 위한 몸부림을 하지 않고 영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영원을 전하고 나누기 위해서 일하게 되겠지.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음을 가져라. 나의 아버지는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전혀 인색하지 않으시고 자비와 애정이 넘쳐 흐르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절대로 걱정하지 말아라. 나를 믿고 함께 가자꾸나.

죽음 앞에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비교적 겸손해집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죽음의 원인이야 알 수 있다지만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절대로 알 수 없고 분명 눈 앞의 시신은 멈춰 있는데 자신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그의 무언가가 남아 있고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제로서는 최고의 교리교육의 장소입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망자를 눈 앞에 두고 하는 교리교육은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 앞에서는 부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뭔가 해답을 찾으려고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한 인간의 영혼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갖게 됩니다. 사람이 이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곧잘 세상 사정에 온 힘을 다 쏟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명예나 권력이 뛰어나도 무가치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영혼을 돌보지 않는 그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가치는 지상의 사물 가운데에서 가장 나은 무엇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으로 마음을 돌이킬 때에 비로소 거기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재산이 그를 신앙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명예로움이 그를 신아에로 이끌지 않습니다. 외적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서 그 미모가 그를 거룩함에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이를 제자리로 돌이킬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지요. 오늘도 장례를 한 건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모두가 다 제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이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보...

실제와 모상

우리가 바라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실제의 핵심을 흐릿하게 간직한 모상들입니다. 친구들과의 우정 속에서 나누는 기쁨은 실제 하늘나라의 온전한 친교의 모상이지요. 모상은 그 자체를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현세의 삶이라는 물에 비춰지는 실제의 모상들을 통해서 그 실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것들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다가는 실제가 떠날 때, 즉 사진에서의 오리가 날아갈 때 그 그림자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처럼 실제를 놓치고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 실제를 진실로 누릴 수 있게 되겠지요.

잊어버리기

어제 봉사자 모임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행여 여러분이 저를 비판한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을 미워할까요? 아니요. 저는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끼지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 여기 영원히 있는 거 아닙니다. 곧 갑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일로 저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 여러분을 위해서 그만두세요. 그리고 제가 있는 동안 사제로서의 저를 실컷 누리세요. 사제가 왜 있을까요?” 그때 한 자매가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요.”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일만은 아니지요. 사제는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사제가 없으면 미사도 고해성사도 없지요. 그러니 제가 있는 동안 저를 실컷 누리세요. 특히 고해성사에 있어서 ‘아, 내가 이런 죄를 고해하면 저 사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거듭 말하지만 저는 금방 갑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들이 드러낸 부정적인 걸 늘 간직하고 살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여기 말고도 한국에서 본당을 많이 거쳐 왔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본당에 있었던 부정적인 것들을 다 기억하고 늘 되새기고 있을까요? 천만에요. 저는 다 잊어버리고 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지요? 제가 그런 좋지 모한 것들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저에게는 그때의 어둠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 당시의 같은 감정에 시달려야 해요. 왜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해야 하지요? 저는 오히려 그 당시의 좋은 기억들을 간직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 도왔던 기억들을 기억하지요. 그런 이들과의 추억은 저에게 늘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기억들은 내던져 버리지요. 이 본당에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제가 이곳에서 있었던 부정적인 사건을 다음 임지에서도 늘 기억하면서 되새길거라고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와서 고해도 보시고 하세요.” 사실 봉사자들 가운데에는 굉장히 고집스런 이들이 ...

사내 연애(?)

교리교사를 하는 두 청년이 봉사자 모임을 마치고 저를 찾습니다. 안그래도 전부터 따로따로 상담을 해 오던 녀석들인데 결국 와서 둘이 사귄다고 털어 놓습니다. 물론 다 알고 있었고 그네들도 내가 다 안다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 지금까지 왜 말하지 못했지? - 겁이 났어요. - 좋아. 근데 왜 겁이 났을까? 그 이유는 뭘까? - 학생들 앞에서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 그래. 그럼 한 번 생각해보자. 둘이 사귀는 게 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 …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가 좀 도와주었습니다. - 두 젊은이가 사귀는 건 나쁜 일이 아니야. 그 나이 때에 할 수 있을 만한 일이지. 하지만 청소년 시기는 뭔가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굉장한 나이야. 그래서 교리교사들이 서로 사귀면서 애정 표현을 생각없이 하면 청소년들은 너도나도 그걸 따라하고 싶을거야. 교리교사들도 사귀는데 자기들이라고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는 조금은 자제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교리교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이 사귄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면 다른 교사들도 안달이 날 게 분명하지. 그러니 그 부분을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래. 그리고 너(남자친구) 몇 살이지? - 17살이요. (만 나이입니다.) - 그래, 그럼 아직 미성년이야, 그렇지? 하지만 너(여자친구)는 성인이지. 그 부분을 조심할 필요가 있어. 너(남자친구)는 아직 사회적으로 온전히 성숙했다고 볼 수 없는 상태이니까 그 점도 조심해서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두 남녀가 사귀다보면 자연히 매력에 끌리는 것도 일반적이니까 그것도 미리 생각을 해 두기를 바래. 그렇게 꾸준히 둘이서 사귀다가 둘 다 나이가 차서 성인이 되면 두 사람의 동의 하에서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겠지만 그 전까지는 아직 한 명이 미성년이니 선을 넘는 행위는 자제할 수 있기를 바래 알겠지? 가능하면 드러내지 말고 둘이서 신중하게 사귀고 가족들에게는...

동성애

오늘 공소 미사를 마치고 뒤늦게 봉사자 모임에 들어갔습니다. 총회장이 YOUCAT교리책을 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루고 있는 테마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성애’ 이야기가 한참 나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교리를 마치고 제가 마무리를 하면서 그 주제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동양인인게 제 탓일까요? 아니지요. 저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향을 지닌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지요. 그러나 단순히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는 동성애자만 있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습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각자의 양심에 따라 무엇을 행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성기가 음경과 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남성의 음경이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가도록 관계를 맺게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동성애자들의 구체적인 관계에는 이 자연스러움이 없을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입니다. 자신들끼리 드러내지 않고 몰래 즐기는 것까지 어쩌겠습니까마는 그것을 합법화 하자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요. 나아가 동성애자가 가정을 이루고자 할 때 둘 사이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입양해야 하겠지요. 헌데 그 아이는 적어도 남성의 아빠와 여성의 엄마를 가질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 고려해야 할 대상이 되겠지요.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양 합법화하자고 하는 것은 잘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키가 엄청 큰 사람이 있어서 자기 의자를 따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의자 기본 규격을 자기들 키에 맞게 확장하자는 것은 좀 이상한 거지요.” 요즘 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의 운동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사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교황님도 그들이 신앙...

술과 유혹

제가 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술을 진탕 마셔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제가 원했던 것, 그때 제가 느꼈던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알고 분별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술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겪어봐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입니다. 다만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끄는 데에 필요한 핵심 줄기를 알 수 있지요. 빛으로 나아가는 방법과 어둠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술을 통해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유혹과 중독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마약을 모른다고 해서 마약을 실험해 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그것을 향한 추구와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가는 본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충분한 것이지요. 술은 그 자체의 향락이 있지만 그 누구도 술 그 자체를 처음부터 사랑해서 다가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은 친구들을 통해서이고 그 친구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어른스러움을 흉내낸다거나 아니면 집의 어른들 중의 생각 없는 누군가가 이미 그 친구에게 술을 가르쳤다던가 하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처음 술을 입에 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리고 그런 걸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술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향과 맛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와 어울림으로 배우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한 술은 사람을 점점 끌어들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어가지요. 어른이 되어 어느 식사 자리든지 가기만 하면 마땅히 술이 함께 곁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술과 친숙해지게 되고 또 나아가서 더 독하고 고급진 술을 찾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와 허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비싸고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술 자체의 필요성 때문에 ...

침묵

어제 성시간에는 ‘침묵’에 대해서 간단한 강의를 했습니다. “여러분, 성시간 중에 죄송합니다만 간단하게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성시간은 침묵 중에 이루어집니다. 헌데 이 침묵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먼저는 귀로 들리는 ‘소리의 침묵’입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거리의 오토바이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니까요. 그러니 이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음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생각의 침묵’입니다. 성시간을 하겠다고 앉아 있으면 온갖 생각과 분심거리가 떠오릅니다. 온갖 상상과 과거의 기억이 마구마구 떠올라 정신이 소란스럽습니다. 이 역시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유일한 수단이라고는 다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렇게 주변의 소음들과 내면의 소음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예수님을 향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마지막 소음이 들려오게 됩니다. 바로 ‘영의 소음’, 즉 양심의 소음입니다. 양심이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이 잠잠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 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음은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이 소음 앞에서 여러분은 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영의 소음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시간을 그대로 즐기면 됩니다. 귀로 들리는 소음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에 중요성을 두지 않으면 우리의 영은 그 순간부터 하느님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오늘 이 거룩한 시간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시간

성시간을 하면 늘 뭔가 더듬어 찾아 헤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온갖 분심에 시달리면서도 그 와중에 하느님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지요. 그리고 눈 앞에는 성체의 모습을 하신 당신이 현존하고 계십니다. 사실은 찾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현존을 누리면 되는데 우리는 여전히 뭔가를 찾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우리가 뭔가 찐한 감동을 느끼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하느님은 바로 눈 앞에 계시는 것이지요. 별다른 말씀 없이 계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 자체로 당신의 현존과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일광욕을 하러 나온 사람이 태양이 자신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은 이미 그 온기와 열기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귀에 들려올 하찮은 소리를 찾는 것과 같지요. 하느님은 성체를 통해서 이미 당신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정서가 위안받을 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에는 매일같이 성체조배와 묵상을 하면서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성경을 펼쳐들고 열심히 읽고 묵상을 했습니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엉뚱한 짓을 한 셈이지요. 아직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늘 뭔가 허전하고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요. 그러나 인내가 점점 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더 차분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뛰어드는 것입니다. 미지의 무언가를 향해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뛰어드는 순간 나의 믿음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벼랑의 나무 뿌리를 꼭 쥐고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 결국엔 손에 힘이 빠지고 나무 뿌리를 놓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아래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를 향해 뛰어 내려야 합니다. 성시간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헌신을 훈련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섭리

하느님의 섭리는 흐르는 거대한 강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강물이 흐르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보다 낮은 곳으로 보다 넓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지요. 섭리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물은 멈추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 결국 바다에 수렴되는 것입니다. 섭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인간들의 자유의지가 존재합니다. 인간들은 강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도, 반대로 가로 막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흐름을 완벽하게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강은 넘쳐 흘러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들어 제가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갇히고 고인 물은 썩고 메말라갑니다. 서서히 증발되어 사라지지요. 인간들은 하느님의 은총의 강에서 멀어져서 자신만의 공간을 창출하려 하지만 결국 그 물은 증발되고 사라져 하늘로 돌아가고 비가 되어 다시 강으로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강의 유속을 더욱 빨리 돕는 영혼은 복된 영혼입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빨리 바다에 도착해서 결국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때로 그런 이들 앞에 방해물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섭리의 방향을 잘 알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큰 강의 흐름을 믿고 자신을 맡깁니다. 섭리에 몸을 맡기는 자와 섭리를 가로막는 자의 싸움은 강을 가로막는 둑을 쌓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둑을 쌓으면 물이 점점 모여듭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강은 결국 그 둑을 터뜨려 버리겠지요. 그리고 그 때에는 더욱 세찬 수압과 흐름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표현하는 바는 섭리를 가로막으려는 자들에 의해서 결국 의인들은 더욱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황금이 더욱 강한 불에 더욱 맑게 정련되는 것과도 같지요.

막가파 신앙인

어리석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 중에 흔히 관찰하는 모습은, 자신이 다된 밥에 재를 가득 뿌려 놓고서는 이 역시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결국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구원에 참여하던지 방해하던지 하는 일을 도맡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한 마음으로 일하려는 이를 비방하고 욕하고 온갖 추한 일들을 하고도 자신의 어리석은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우겨대는 막가파 신앙인은 참으로 한심한 존재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그들의 그러한 온갖 방해를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이 더욱 빛을 내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즉에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더라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졌을 것이건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지요.

청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그렇다면 청원기도는 필요가 없겠군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헌데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몰라서 우리에게 필요하다 싶은 것을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한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에게 청을 드리는 것이지요. 이 청을 드리는 행위를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지 않는 대상에게 청을 드리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대상은 적어도 내가 그를 신뢰할 때에, 즉 나에게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힘이 없고 내가 청하는 그가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줄 권능이 있다고 믿을 때에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을 왜 청하겠습니까? 바로 이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의 청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주시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청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1000만원이 꼭 필요하다고 돈을 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번번이 사업이 실패합니다. 더 많은 시련을 겪고 더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실 일종의 ‘시험’에 드는 것이지요. 그의 믿음이 진실한가 아닌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는 사람인가를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첫 난관 속에서 신앙을 저버...

하느님을 도와 드리기

어린 아이가 똥을 싼다고 해서 부모님의 심정이 상하지는 않습니다. 똥은 치우면 그만이고 부모님은 여전히 아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반항하기 시작하면 부모님의 심정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마음을 빼앗긴 대상이 그 아이를 결국 해칠 것이 뻔한 데도 아이가 고집을 피울 때 부모님의 마음은 더욱 무너집니다. 우리 인간이 약하다고 해서 하느님이 사랑을 거두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약함을 당신 은총으로 채우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하느님 아닌 것을 탐하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할 때에 하느님은 마음 아파 하십니다. 하느님이 완전하시다고 그분이 안타까워하거나 마음아파 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철없는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복음서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늘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문간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준비시키고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 다른 이들도 온유와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 일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은 하느님에게는 사랑을 드러내실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약하지 않고 완벽했다면 하느님이 굳이 우리를 보살필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는 약하고 쓰러지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점이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지는 않으셨지만 우리를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하게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할 일을 절대로 잊어서도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사고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인간의 쓰임새

어떤 연필이 최고의 연필일까요? 고급 마크가 적힌 것? 화려한 지우개가 달린 것? 색상이 화려한 것? 연필은 그것으로 최고의 작품이 나올 때에 비로소 최고의 연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아무리 화려한 연필이라도 그것이 제 쓰임새 대로 쓰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과연 그 본래의 쓰임새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달리 생각하기에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쓰임새를 찾아서 열중합니다. 누군가는 최고의 미모를 지향하고, 누군가는 최고의 인기와 권력을 갈구하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의 쓰임새는 인간을 만드신 분의 목적에 따라 쓰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참된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제멋대로의 제 뜻을 쫓아가다가 결국 멸망해버리지 않도록 하느님은 인간에게 길을 가르치셨지요.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창조목적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이는 ‘고통’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돈을 조금 더 벌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들에게 희생을 통한 사랑의 가치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열렬히 갈구해서 얻는 그 즉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바람을 잡는 행위처럼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에 이미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리는 허황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가 믿는 희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같이 살아가면서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기대하게...

다른 복음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4) 사실 가끔 인터넷에 다른 이들이 공유하는 기사를 보다 보면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기사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가톨릭의 이름을 내세우고는 가톨릭을 정면으로 짓밟는 것 같은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공유를 하고 공감을 표시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가르치신 바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럼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심판하지 마라, 용서하라. 일곱 번에 일흔 번 용서하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밖에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르침들입니다. 헌데 증오를 조장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를 조장하는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기꺼이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이들이 있으니 저로서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예수님이 언제 원수를 짓밟고 그 위로 올라서라고 했다는 말입니까? 언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후계자들이 완벽할 거라고 했다는 말입니까? 당신은 죄인들을 초대하러 오신 의사이셨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서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이들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들의 ‘모순’입니다. 그들은 권위를 비난하면서 권위에 기대고, 교황님을 언급하면서 교황권과 교계제도는 사실상 존중할 필요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간단한 모순마저도 읽어내지 못하니 그 기사를 읽고 공감하는 이들의 눈도 닫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을 그런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욕구에 솔직하게 대응하는 방법

아이가 뭔가 잘못했을 때에 엄마들이 그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이를 때리고 위협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인터넷방’이 점점 유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피씨방이지요. 아이들은 거기에 가고 싶어하고 엄마들은 그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엄마 동전까지 훔쳐서 거기에 가게 되지요. 그리고 발각되는 날이면 비오는 날에 먼지 날 정도로 두드려 맞는 셈입니다. 자, 이런 일련의 행동의 결과를 예상해봅시다. 아이들이 인터넷방에 가는 이유는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유이지요. 왜냐하면 거기 가면 재미가 있고 집에서 지루하게 있는 것보다는 그곳의 유혹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친구들도 거기 가기 때문에 아이로서는 그 가고 싶은 마음이 엄청나지는 것입니다. 이때 엄마가 와서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그 수단은 엄포를 놓는 것이고 아이를 위협하고 때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의 내면의 욕구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엄마의 그런 부정적인 금지 방법으로 인해서 아이는 자신의 욕구에 상응하는 ‘반감’까지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엄마가 미처 신경쓰지 못할 때, 또는 엄마가 힘이 모자라서 더는 가로막지 못할 때에 그 반작용으로 더 많은 어둠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엄마는 아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이가 거기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잘 듣고 엄마로서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서로 대화해야 하지요. 그리고 나름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하고 그 수단이 인터넷방 뿐이라면 엄마로서는 그 부분을 존중하고 도와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가 동전을 훔쳐가면서 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럼에도 엄마와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잃지 않도록 준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터넷방에 자꾸 가게 되었을 때 예상되는 결과도 아이가 이해할 수...

틀어진 마음

어제 한 여학생이 다가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전에는 곧잘 찾아와서 이런 저런 질문을 해오던 녀석이었습니다.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 제가 그동안 신부님 잘 찾아뵙지 못했지요? 실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그 여학생은 자기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내면 안에 뭔가 움직임이 있고 그것을 나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고민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그는 자신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누군가는 이미 나에게 와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 놓았기에 저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알면서도 모른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말을 하던 그 여학생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요. 대부분의 해답은 이미 자신 안에 숨어있는 법입니다. 상담가는 그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요. 그러나 이 면담은 저에게 또다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거룩함에 다가서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자신 안에 세운 뜻이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요. 물론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지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 앞으로도 너는 누구든지 사귀게 될거야. 이번 일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기를 바래.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올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실망을 맛볼 뿐이야. 네가 하느님 안에 자리하고 있을 때에 모든 관계를 올바르게 이루어 나갈 수 있어.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단점이 있고 결함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네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있는거야. 이 점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래. 사실 그 학생이 제가 설명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그의 방향성이 다시 정상궤도...

단편소설 / 유다의 회심

유다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그였으나 덜덜 떨리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유다는 돌아서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을 만나던 날 보인 모습이었다. 유다는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 그분의 따스한 애정에,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에 그가 드러낼 수 있는 거라고는 눈물 뿐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따스하게 안아 주셨다. 그리고 그 날은 모두가 기쁘고 평화로이 만찬을 즐겼다. 다른 사도들은 회개한 유다 사도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만찬장으로 한 무리의 일당이 들어왔다. 전날 밤 제사장들은 마음이 조급하기 그지 없었다. 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했는데 유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리들을 고용해서 만찬장으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만찬상 아래로 숨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동자를 가려 잡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만찬장의 한 가운데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버려두어라! 몽둥이를 들고 활기차게 움직이던 이들이 그 말씀 한 마디에 우뚝 서버렸다. -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냐. 다른 이들은 내버려 두어라. 맞는 말이었다. 그들이 지시받은 것은 모인 이들 중에서 리더를 잡아 오라는 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멈추어섰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 여기 내가 있다.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잡으러 온 사람들이 기가 죽어 도리어 예수님에게 잡혀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마지 못해 예수님을 붙들고 두 손을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살기와 그들이 느끼기까지 했던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유다가 나섰다. - 이보시오. 여기! 여기 은전이 있소. 당신의 감독들이 나에게 건네준 돈이오...

손이 오그라든 병자

손이 오그라든 병자 앞에서 예수님이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손이 오그라들거나 그보다 더 심한 병이 든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안타까워 한 것은 그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대에 올리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노기를 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장님이 되어버린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안타까워 하셨던 것이지요. 그들은 남을 돕기는 커녕 남을 시험대에 들게 하고 공격하고 무너뜨리려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이야말로 진정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었고 치유가 시급한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에게 오그라든 손을 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그를 치유하시지요. 하지만 닫혀진 마음, 그들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닫아버린 마음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전능으로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연민’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지요. 분노는 일어났지만 그것에 사로잡히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두셨지요. 우리가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갈구하고 얻어야 할 것은 육체의 질병의 개선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우리의 닫혀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식과 내면

돈을 많이 가졌다고 남을 자동으로 도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집에 쌓인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그것으로 남을 돕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집에 가진 건 없어도 남을 도울 마음이 가득하다면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을 돕게 마련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의 ‘형식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사를 다 받았다고 특정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고 그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자동으로 구원이 예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성사의 은총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세례성사를 받은 이라면 자신의 새로 태어난 삶을 실제로 살아야 하며, 성체성사를 모시는 사람이라면 에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타인들에게 내어 주어야 하며,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영적 성장의 은총, 성령의 은총을 받은 대로 남에게 그 은총을 통해서 봉사해야 하며, 혼배성사를 받은 이라면 그 성사의 은총대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배우자를 열렬히 사랑해야 하고, 성품성사를 받은 이라면 그 특별한 은총 속에서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이끌어야 하고, 고해성사를 받은 이는 그 용서의 은총으로 다른 이들의 허물도 용서해야 하며, 병자성사를 받은 이라면 영원의 희망에 가득 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방향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외적 형식을 완료했다고 자동으로 계단을 올라서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아이가 깨끗이 세탁된 옷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옷에 더러움이 묻을 때마다 스스로 세탁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씀씀이가 어디를 향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의 이기적 특성으로 모든 외적 형식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정말 내가 배우고 들은 것을 열심히 실천할 마음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꾸르실료를 아무리 열심히 수강해도 청년 성서 모임을 아무리 완수해도 소용이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