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인간으로부터 존재의 여부를 의심받긴 하나 실제로 존재하는 분을 의심한다고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권한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권한을 지극한 자비와 사랑으로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반드시 훗날에는 정의와 공정을 남김없이 실현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흠없이 보여주신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에게 봉헌하는 이상은 그분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든 것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영, 외아들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 역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능력과 권위를 전해줍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교회)의 권한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지니는 권위는 다른 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권한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교회, 성령을 가장 잘 받아들인 교회가 가장 큰 권위를 지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여러가지 의견들이 난무합니다. 저마다의 교회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내세우고 또 심지어는 교회 따위는 필요없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머리로 하는 당신의 몸, 당신의 지체를 이루셨지요. 그것이 교회의 핵심 개념입니다. 교회의 구체적인 상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세부적으로 알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모습은 마땅히 원하신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모습, 스승이신 분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발을 닦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가장 합당한 모습이겠지요.
우리가 실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는 한 인간의 궁극적인 깨달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전수받게 됩니다.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기도 하고 이웃의 신앙을 전해 받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가운데 신앙을 소개 받기도 하지요. 어떤 형태로든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대 일로 관계를 맺겠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가 번역해서 내어놓은 성경과 가르침이 없이는 하느님의 뜻을 합당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이제 개개인의 선택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어떤 신앙 공동체를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이는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저는 왜 가톨릭 신앙인인 걸까요? 저는 교회의 오류들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는 장님인 걸까요? 가톨릭 교회는 마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인 걸까요? 그 안의 구성원들은 모두 성인인 걸까요?
저는 교회의 오류들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스스로를 통해서 그리고 담당하는 본당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톨릭 교회를 사랑합니다. 제가 실천적으로 누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가 지닌 여러가지 은총의 보고와 풍부한 샘을 아직까지는 다른 교회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가톨릭 신자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저는 늘 이 말을 기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만일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숱한 오류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생명을 잃는다면 결국 하느님은 이 교회를 돌보시지 않으시고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정화 시스템은 늘 존재해 왔고 그릇됨을 늘 바로잡아 왔습니다. 비록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큰 맥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또한 제가 가톨릭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흠없이 보여주신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에게 봉헌하는 이상은 그분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든 것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영, 외아들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 역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능력과 권위를 전해줍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교회)의 권한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지니는 권위는 다른 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권한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교회, 성령을 가장 잘 받아들인 교회가 가장 큰 권위를 지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여러가지 의견들이 난무합니다. 저마다의 교회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내세우고 또 심지어는 교회 따위는 필요없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머리로 하는 당신의 몸, 당신의 지체를 이루셨지요. 그것이 교회의 핵심 개념입니다. 교회의 구체적인 상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세부적으로 알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모습은 마땅히 원하신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모습, 스승이신 분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발을 닦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가장 합당한 모습이겠지요.
우리가 실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는 한 인간의 궁극적인 깨달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전수받게 됩니다.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기도 하고 이웃의 신앙을 전해 받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가운데 신앙을 소개 받기도 하지요. 어떤 형태로든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대 일로 관계를 맺겠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가 번역해서 내어놓은 성경과 가르침이 없이는 하느님의 뜻을 합당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이제 개개인의 선택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어떤 신앙 공동체를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이는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저는 왜 가톨릭 신앙인인 걸까요? 저는 교회의 오류들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는 장님인 걸까요? 가톨릭 교회는 마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인 걸까요? 그 안의 구성원들은 모두 성인인 걸까요?
저는 교회의 오류들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스스로를 통해서 그리고 담당하는 본당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톨릭 교회를 사랑합니다. 제가 실천적으로 누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가 지닌 여러가지 은총의 보고와 풍부한 샘을 아직까지는 다른 교회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가톨릭 신자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저는 늘 이 말을 기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만일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숱한 오류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생명을 잃는다면 결국 하느님은 이 교회를 돌보시지 않으시고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정화 시스템은 늘 존재해 왔고 그릇됨을 늘 바로잡아 왔습니다. 비록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큰 맥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또한 제가 가톨릭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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