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으려는 마음은 아주 정상입니다. 하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하기에 슬픔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 다른 사랑을 갈구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사랑은 모두 한계점을 지니고 있지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밖의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상이 하느님과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인간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에게 다가가 직접 그분의 사랑을 수액을 받아 마시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길은 좁고 온갖 난관이 가득한 길이라 걸으려 하는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사랑에 주린 영혼을 채워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느님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도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이들은 막연히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찾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에 더욱 상처받는 것입니다.
목자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목자를 통해서 다른 여느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가 사랑을 뿜어주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목자에게서 남다른 사랑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제에 대한 사랑의 기대치가 큰 이유입니다. 사제가 적어도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사랑이 오염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사랑 한다는 핑계로 ‘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랑의 기대치가 역으로 작용해서 목자를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목자는 ‘하느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근간으로 주변의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사랑의 모습이지요.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 온전히 기댈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고 그분의 능력을 나누어 받는 이에게도 불가능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에게 기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밖의 재주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 아무리 세상적인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밖의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상이 하느님과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인간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에게 다가가 직접 그분의 사랑을 수액을 받아 마시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길은 좁고 온갖 난관이 가득한 길이라 걸으려 하는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사랑에 주린 영혼을 채워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느님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도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이들은 막연히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찾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에 더욱 상처받는 것입니다.
목자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목자를 통해서 다른 여느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가 사랑을 뿜어주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목자에게서 남다른 사랑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제에 대한 사랑의 기대치가 큰 이유입니다. 사제가 적어도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사랑이 오염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사랑 한다는 핑계로 ‘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랑의 기대치가 역으로 작용해서 목자를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목자는 ‘하느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근간으로 주변의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사랑의 모습이지요.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 온전히 기댈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고 그분의 능력을 나누어 받는 이에게도 불가능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에게 기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밖의 재주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 아무리 세상적인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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