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술을 진탕 마셔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제가 원했던 것, 그때 제가 느꼈던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알고 분별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술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겪어봐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입니다. 다만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끄는 데에 필요한 핵심 줄기를 알 수 있지요. 빛으로 나아가는 방법과 어둠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술을 통해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유혹과 중독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마약을 모른다고 해서 마약을 실험해 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그것을 향한 추구와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가는 본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충분한 것이지요.
술은 그 자체의 향락이 있지만 그 누구도 술 그 자체를 처음부터 사랑해서 다가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은 친구들을 통해서이고 그 친구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어른스러움을 흉내낸다거나 아니면 집의 어른들 중의 생각 없는 누군가가 이미 그 친구에게 술을 가르쳤다던가 하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처음 술을 입에 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리고 그런 걸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술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향과 맛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와 어울림으로 배우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한 술은 사람을 점점 끌어들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어가지요. 어른이 되어 어느 식사 자리든지 가기만 하면 마땅히 술이 함께 곁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술과 친숙해지게 되고 또 나아가서 더 독하고 고급진 술을 찾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와 허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비싸고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술 자체의 필요성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라 때로는 술의 가격과 그 모임 자리의 중요성 때문에 마시게 되는 것이지요. 사회적인 위신과 관계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위가 낮을 때에는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하다가 어느새 본인도 나이가 들어 높은 지위에 있게 되지만 별다른 취미를 얻지 못해서 역시 본인도 같은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정신도 피폐해져 갑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정도 무너지고 공동체를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동체도 슬슬 기울어져 가지요. 그럴 때 쯤이면 이미 상당히 엇나간 길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술에 대한 욕구가 영혼 안에 자리잡아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몇차례 술 때문에 진탕 고생을 하고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내장을 다 꺼낼듯이 토하고 나서도 며칠이 지나고 나면 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술 자체의 향락이 아니라 술자리에 어울리는 이들과의 친교를 더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의 찰나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바라는 것은 사실 다른 거룩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친숙한 방법을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이지요. 길을 어긋나는 과정은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은 속에 독을 감추고 있고 결국 그 독기를 우리 안에 퍼뜨려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술, 탐욕, 명예, 권력, 성(性)의 모든 유형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는 화려하지만 속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사악한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그것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분함’으로 일축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도를 하거나 거룩한 삶을 주변에 권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웃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술을 통해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유혹과 중독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마약을 모른다고 해서 마약을 실험해 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그것을 향한 추구와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가는 본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충분한 것이지요.
술은 그 자체의 향락이 있지만 그 누구도 술 그 자체를 처음부터 사랑해서 다가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은 친구들을 통해서이고 그 친구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어른스러움을 흉내낸다거나 아니면 집의 어른들 중의 생각 없는 누군가가 이미 그 친구에게 술을 가르쳤다던가 하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처음 술을 입에 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리고 그런 걸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술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향과 맛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와 어울림으로 배우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한 술은 사람을 점점 끌어들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어가지요. 어른이 되어 어느 식사 자리든지 가기만 하면 마땅히 술이 함께 곁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술과 친숙해지게 되고 또 나아가서 더 독하고 고급진 술을 찾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와 허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비싸고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술 자체의 필요성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라 때로는 술의 가격과 그 모임 자리의 중요성 때문에 마시게 되는 것이지요. 사회적인 위신과 관계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위가 낮을 때에는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하다가 어느새 본인도 나이가 들어 높은 지위에 있게 되지만 별다른 취미를 얻지 못해서 역시 본인도 같은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정신도 피폐해져 갑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정도 무너지고 공동체를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동체도 슬슬 기울어져 가지요. 그럴 때 쯤이면 이미 상당히 엇나간 길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술에 대한 욕구가 영혼 안에 자리잡아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몇차례 술 때문에 진탕 고생을 하고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내장을 다 꺼낼듯이 토하고 나서도 며칠이 지나고 나면 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술 자체의 향락이 아니라 술자리에 어울리는 이들과의 친교를 더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의 찰나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바라는 것은 사실 다른 거룩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친숙한 방법을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이지요. 길을 어긋나는 과정은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은 속에 독을 감추고 있고 결국 그 독기를 우리 안에 퍼뜨려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술, 탐욕, 명예, 권력, 성(性)의 모든 유형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는 화려하지만 속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사악한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그것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분함’으로 일축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도를 하거나 거룩한 삶을 주변에 권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웃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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