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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5)

아, 저는 수십년 동안 교회에 몸담아 왔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복사단 활동을 했고 이어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교리교사활동까지 했지요. 결혼을 하고는 레지오에도 빠지지 않았고 단장까지 맡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이제 저를 칭찬해 주셔야지요?

너는 어린 시절 네 부모가 너를 성당에 보내었다. 네가 가기 싫다는 것을 매주 맛있는 걸 사주며 가라고 독촉을 했지. 그래서 너는 그 맛에 성당을 가기 시작했다. 너는 복사단 활동을 하면서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어른들은 너를 복사단 활동을 한다며 칭찬을 했고 친구들은 제대 위에 장백의를 입고 서 있는 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 너는 그것을 충분히 즐겼다. 그리고 복사단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네 입지를 통해서 너는 거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지. 네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은 이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너는 명예와 권력을 이미 그때부터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의 주일학교 활동 안에서 너의 위신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너는 어른들에게 ‘모범적인 아이’로 칭송을 받았고 너는 그것을 여자친구를 사귀는 목적으로 썼지. 아이들은 막연히 너를 동경하고 있었고 너는 그것을 즐기며 이 여자아이, 저 여자아이와 놀아나는 데에 썼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네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고는 모두의 마음을 망쳐놓았지.

너희 교리교사생활은 더 최악이었다. 너는 늘 ‘친교’를 핑계로 술을 마실 구실을 찾았다. 성당 안에서 터줏대감이 되어버린 너는 보좌신부님마저 데리고 놀려고 했지. 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며 네 마음에 들지 않는 보좌 신부님의 뒷담화를 했다. 수녀님은 그런 너를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어 버렸지. 너는 나의 종들의 사목활동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었고 너의 악습을 다른 교사들에게 물들이고 있었다. 물론 너의 바람기는 교사생활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고 너는 새로 들어온 신입 교사를 꼬시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때가 되니 너도 결혼을 하더구나. 하지만 네가 하던 버릇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너는 레지오의 환락부장이었지. 온갖 2차 주회를 집도하면서 너는 순수한 마음으로 레지오에 참석하려는 모든 이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매번 레지오 집회 후에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다퉈야 했다. 그리고 너는 주임 신부마저도 너의 그 지저분한 술자리에 자주 참석하게 해서 그의 건강과 정신을 모두 버려 놓았지. 그 사제는 처음부터 그렇게 술을 즐긴 것이 아니었다. 너와 같은 이들이 조금씩 물들여간 것이다. 아, 그리고 그 신학생, 너희들이 초대해서 온갖 진귀한 술이랍시며 맛보게 한 그 신학생은 이미 그 마음에 술에 대한 동경과 ‘부유함’에 대한 탐욕이 자리잡았다. 네가 레지오 단장을 맡을 때는 언뜻 외적으로는 너의 레지오가 최고의 단합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상 너의 레지오는 최악의 단체였다. 나의 어머니가 너희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희가 알 수 있었다면.

자, 이제 말해보아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칭찬이라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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