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태 7,29)
권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권위를 정복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는 물흐르듯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참된 권위가 없는 이는 다른 이를 ‘정복’하려고 하지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대를 억지로 내리눌러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힘을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그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글을 배울 능력이 없고 법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이들을 자신이 가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지배하려고 했지요.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법으로 정치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권력으로 경제인들은 돈으로 같은 일을 실행합니다. 결국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는 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참된 권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는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작용을 합니다. 여성들이 미모에 대해서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미모’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일종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갈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의 인기가 사회적으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절로 그 권위 아래 순종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억지로 내리누를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겸손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을 하고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면모를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진실성이 있었고 그분은 사람들 사이를 거닐면서 당신을 차별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특별한 힘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분의 권위가 절로 흘러나오는 것을 체험한 셈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제법 똑똑해 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가 진정한 권위가 있는지 아니면 억누르려고 하는지 대번에 눈치채고야 말지요.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권위적’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의 정신을 잃고 교회가 지닌 ‘의무사항’으로 다른 이들을 내리누르려 할 때에 그들은 그것을 직감하고 비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참된 봉사에서 나와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곁에서 그들을 돌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곁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을 것도 분명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길 뿐이지요.
권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권위를 정복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는 물흐르듯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참된 권위가 없는 이는 다른 이를 ‘정복’하려고 하지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대를 억지로 내리눌러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힘을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그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글을 배울 능력이 없고 법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이들을 자신이 가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지배하려고 했지요.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법으로 정치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권력으로 경제인들은 돈으로 같은 일을 실행합니다. 결국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는 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참된 권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는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작용을 합니다. 여성들이 미모에 대해서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미모’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일종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갈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의 인기가 사회적으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절로 그 권위 아래 순종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억지로 내리누를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겸손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을 하고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면모를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진실성이 있었고 그분은 사람들 사이를 거닐면서 당신을 차별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특별한 힘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분의 권위가 절로 흘러나오는 것을 체험한 셈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제법 똑똑해 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가 진정한 권위가 있는지 아니면 억누르려고 하는지 대번에 눈치채고야 말지요.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권위적’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의 정신을 잃고 교회가 지닌 ‘의무사항’으로 다른 이들을 내리누르려 할 때에 그들은 그것을 직감하고 비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참된 봉사에서 나와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곁에서 그들을 돌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곁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을 것도 분명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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