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볼 수 없으면 길을 걷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뭔가로 앞을 더듬으면서 가지 않으면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언제 돌부리에 발을 부딪히게 될지, 머리 높이에 뭔가가 있지는 않을는지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헌데 자신이 눈이 먼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길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에 세게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다 망가지겠지요.
문제는 이런 일이 영적으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이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섣불리 행하는 모든 행동은 아주 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서지 말아야 할 곳에 나서고, 자신은 모든 시련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능력에 합당하지도 않은 시련을 몸소 떠맡으려고 하다가 힘이 부쳐 쓰러지고 마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은 단순히 선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 이웃이 불쌍해 보인다고 서투른 조언을 던지다가는 상담하는 그도 망쳐버리게 되고 공연한 적대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걷게 될 영적 여정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저 좋아 보인다고 신학교나 수도회에 덜렁 들어갔다가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와서는 교회에 은근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도 있습니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증오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서 모든 일을 ‘필요한 것’이라고 합리화 시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바탕은 증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들은 파괴적입니다. 그 파괴성이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들은 관계를 파괴하고 흔히 맞서는 상대자를 파멸시키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영적 장님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성모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셨지만 가장 겸손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겸손과 순명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참된 지혜이고 우리의 눈을 진정으로 밝혀 줄 지혜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영적으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이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섣불리 행하는 모든 행동은 아주 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서지 말아야 할 곳에 나서고, 자신은 모든 시련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능력에 합당하지도 않은 시련을 몸소 떠맡으려고 하다가 힘이 부쳐 쓰러지고 마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은 단순히 선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 이웃이 불쌍해 보인다고 서투른 조언을 던지다가는 상담하는 그도 망쳐버리게 되고 공연한 적대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걷게 될 영적 여정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저 좋아 보인다고 신학교나 수도회에 덜렁 들어갔다가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와서는 교회에 은근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도 있습니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증오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서 모든 일을 ‘필요한 것’이라고 합리화 시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바탕은 증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들은 파괴적입니다. 그 파괴성이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들은 관계를 파괴하고 흔히 맞서는 상대자를 파멸시키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영적 장님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성모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셨지만 가장 겸손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겸손과 순명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참된 지혜이고 우리의 눈을 진정으로 밝혀 줄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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