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요. 그는 사막의 은수자로 살아왔으며 가장 금욕과 극기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회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다가오실 주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낮추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간은 자신을 이겨내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을 스스로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인 셈이지요. 함께 살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고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거슬러서 광야에서 홀로 외로이 투쟁하며 모든 편안함을 내던져 버린 인물이 바로 요한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요구를 단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남김없이 지켰을 것은 누구나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것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외아들의 사랑이 가장 완벽한 율법을 수행하던 이를 월등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의 세례 이후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온 성령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일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으로 그를 충만히 채우신 것입니다.
누가 더 나은 신앙인인가를 따지고 들 때 흔히들 자신이 행하는 극기를 자랑하게 됩니다. 남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신앙의 드높음을 드러내려고 하지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율법적 충실도가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인간애’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상실한 인간 사랑은 언제나 부족한 사랑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위해 부여되는 그 어떤 사명이라도 기꺼이 도맡아 수행할 수 있게 되지요.
요한은 인간적 극기와 미덕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모든 인간적 완벽함을 월등히 뛰어넘은 셈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요. 그는 사막의 은수자로 살아왔으며 가장 금욕과 극기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회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다가오실 주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낮추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간은 자신을 이겨내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을 스스로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인 셈이지요. 함께 살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고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거슬러서 광야에서 홀로 외로이 투쟁하며 모든 편안함을 내던져 버린 인물이 바로 요한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요구를 단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남김없이 지켰을 것은 누구나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것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외아들의 사랑이 가장 완벽한 율법을 수행하던 이를 월등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의 세례 이후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온 성령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일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으로 그를 충만히 채우신 것입니다.
누가 더 나은 신앙인인가를 따지고 들 때 흔히들 자신이 행하는 극기를 자랑하게 됩니다. 남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신앙의 드높음을 드러내려고 하지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율법적 충실도가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인간애’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상실한 인간 사랑은 언제나 부족한 사랑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위해 부여되는 그 어떤 사명이라도 기꺼이 도맡아 수행할 수 있게 되지요.
요한은 인간적 극기와 미덕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모든 인간적 완벽함을 월등히 뛰어넘은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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