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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 이야기

롯의 이야기는 죄악이 가득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의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의인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죄인들이 가득한 그 고장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가는 같이 재앙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미련을 남기면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화염이 떨어진다거나 누군가가 소금기둥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넓힌다면 비슷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요.

어느 공동체가 그릇된 선택을 하고 그 방향성이 도저히 수정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의인을 살리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물론 의인은 그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이미 최선을 다 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도 의롭지 못하며 나아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신경질만 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는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십니다. 그에게 천사를 보내 다가올 재앙을 경고해 주시지요. 이 초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고 어느 사람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의인은 보다 참된 길을 찾기 위해서 여정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사실 수많은 성인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모두 성인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성인들은 하느님만을 바래서 나아가고자 했고 사람들은 그런 성인들의 모습을 무시하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요. 그런 방해 속에서도 성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때가 다가오게 되면 성인은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자신의 길을 가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이는 이 세상에서 특수한 사명을 받은 성인들 버전입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통상적인 일이 일어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영원히 남아 있을 세상이 아니지요. 우리의 참된 세상은 영원 속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매여 살아가지요. 하느님의 영원성을 잃고 세상에 매여 살아갈수록 우리의 지성은 더욱 마비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살아가기 시작하지요. 그러면 결국 모두 멸망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을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때가 이르러 그들을 더욱 가까이 부르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요.

헌데 그 와중에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삶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욕구에 빠져들려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돌아보던 그들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소금은 짠 맛이고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헌데 그런 소금이 가득한 채로 기둥이 되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삶을 가꾸어 놓고는 마지막 순간에 소금이 가득한 기둥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의 운명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세상을 탐하는 이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끝까지 항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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