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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유다의 회심

유다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그였으나 덜덜 떨리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유다는 돌아서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을 만나던 날 보인 모습이었다. 유다는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 그분의 따스한 애정에,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에 그가 드러낼 수 있는 거라고는 눈물 뿐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따스하게 안아 주셨다. 그리고 그 날은 모두가 기쁘고 평화로이 만찬을 즐겼다. 다른 사도들은 회개한 유다 사도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만찬장으로 한 무리의 일당이 들어왔다. 전날 밤 제사장들은 마음이 조급하기 그지 없었다. 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했는데 유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리들을 고용해서 만찬장으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만찬상 아래로 숨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동자를 가려 잡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만찬장의 한 가운데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버려두어라!

몽둥이를 들고 활기차게 움직이던 이들이 그 말씀 한 마디에 우뚝 서버렸다.

-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냐. 다른 이들은 내버려 두어라.

맞는 말이었다. 그들이 지시받은 것은 모인 이들 중에서 리더를 잡아 오라는 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멈추어섰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 여기 내가 있다.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잡으러 온 사람들이 기가 죽어 도리어 예수님에게 잡혀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마지 못해 예수님을 붙들고 두 손을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살기와 그들이 느끼기까지 했던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유다가 나섰다.

- 이보시오. 여기! 여기 은전이 있소. 당신의 감독들이 나에게 건네준 돈이오. 그러니 이걸 다시 가져가시오. 그리고 주님은 놓아주시오.

패거리 중의 하나가 그의 손을 확 제쳐버렸다. 돈주머니가 땅에 흘렀고 바닥으로 동전들이 나뒹굴었다.

- 그딴 돈은 필요없다! 이 비열한 놈. 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유다는 절망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괜찮다. 너를 구했으니 나로서는 미련이 없구나. 이제는 기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그 말을 하는 중에 패거리는 예수님을 잡아 당겨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뒹굴고 있는 살림 살이 가운데 유다와 베드로 요한과 안드레아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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