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공부한다는 말은 신앙 지식을 습득한다는 말로 대치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리교육이 많은 경우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믿는 바를 실천해보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것을 ‘학문’으로 변질시켜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 버리면 신앙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은 존재하기 힘든 법입니다.
가장 기초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삶으로 온전히 숙지하지 못한 채로 배움의 장소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은 기초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서 사람들의 신앙 지식에 대한 요구도 갈수록 더 해박해지고 신학을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을 다 외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일자 무식한 할머니도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써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공허한 말잔치로 더 고급 지식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집을 튼튼한 바위 위에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 박사 학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안에 형성된 진실한 믿음, 구체적인 일상으로 드러나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삶으로 온전히 숙지하지 못한 채로 배움의 장소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은 기초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서 사람들의 신앙 지식에 대한 요구도 갈수록 더 해박해지고 신학을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을 다 외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일자 무식한 할머니도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써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공허한 말잔치로 더 고급 지식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집을 튼튼한 바위 위에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 박사 학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안에 형성된 진실한 믿음, 구체적인 일상으로 드러나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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