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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는 미성년자들

며칠 전 뉴스에 우리 동네 이름이 나오면서 청소년들이 모여서 한 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완전히 취해서 경찰이 와서 데려가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녀석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그러고 있었다고 전하더군요. 경찰은 술을 누가 판매를 한 것인지 조사를 하고 부모들에게 아이들 심리 상담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개선되었을까요? 저로서는 상당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성실히 학교를 다니고 부모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어울려 진탕 취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자신들이 지금 하는 행동의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지요. 일단은 그런 행위를 그치도록 가로막기는 해야 하겠지만 과연 그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그 ‘욕구’가 어떻게 잠재워질지 저로서는 의심스럽습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욕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요? 욕구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든 저든 무언가를 원하게 마련이지요. 다만 그 욕구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하느님에게 다가서야 하고 보다 거룩한 것을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대뜸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의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욕구가 처음 방향을 설정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에게 칭찬을 받아서 좋아하는 아이가 그 칭찬의 대상이 자신이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쁜 악세사리 때문인지에 따라서 향후 더욱 칭찬받고 싶어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꾸중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냥 어른이 짜증이 나서 꾸중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잘못해서 정당한 질책을 듣는 것인지 아이는 알고 있지요.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도 내면의 방향이 형성되는 셈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의 욕구는 길들여질 수 있고 길들여져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욕구를 길들이기보다는 그저 포장만 바꿀 뿐입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모든 종류의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놓았지요. 음식을 아주 맛깔나게 먹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방식들이 준비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시각적 재미를 위해서 텔레비전은 온갖 영상물을 쏟아내고 보편 윤리관이 허용하는 지점을 찾아내지요. 어린 여자 아이돌에게 속옷을 입혀 내보내면 범죄이지만 비키니를 입히는 건 괜찮은 식입니다. 아름다운에 대한 추구는 돈만 충분하고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형을 할 수 있게 되어있지요. 세상은 그러한 모든 것들이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욕구를 더욱 끌어올리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놀음에 놀아나는 동안 당연히 하느님에게서는 더욱 멀어지게 되지요.

미성년인데 이미 술을 즐기기 시작한 아이들은 향후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다면 그들의 욕구는 그쪽 방향으로 고착될 것입니다. 그럼 그 헌신적인 노력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상인은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하면 안되겠지요. 그리스도인 경찰은 그런 청소년들을 선도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리스도인 심리학자는 그런 청소년들을 진심으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희망을 전해야 하겠지요. 그 어느 누구 하나도 이 책임에서 멀어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지쳐있고, 상인들은 탐욕스러우며, 경찰은 나태하고, 심리학자는 사람들을 돕기는 커녕 자신의 명예에만 매달려 있으니 남은 거라고는 동네 본당 신부가 힘 닿는 데까지 해 보는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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