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용감합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반면, 거짓은 두렵습니다. 자신의 거짓이 드러날까 숨어야 합니다. 숨기 위해서 새로운 거짓말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용기’있고 당당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실하신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반면 악마는 속이는 자고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둠과 손을 잡은 이들은 ‘두려움’이 점점 커져갑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영혼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넣을 수 있는 분을 합당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의 덕입니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그분을 향한 두려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지요.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악마의 먹이가 됩니다. 악마는 하느님의 자녀에게 어떤 짓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모셔져 있는 성령을 꺼낼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성령을 내쫓으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어둠의 영이 스며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은 어둠의 영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점을 보고 사주를 보는 것, 타로 카드와 같은 것이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연한 두려움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데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제한합니다. 누구를 만나면 안된다는 둥, 어느 방향을 조심해야 한다는 둥의 허튼 소리를 듣다보면 일종의 ‘두려움’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그런 것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이들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변명은 ‘재미로’라는 것이지만 결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인들 스스로 알고 있지요. 뭔가 은근히 거기에서 바라는 것이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했다면 매를 맞아도 덜 맞겠지만 위의 사항을 잘 알고도 다가선다면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양심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허튼 곳에 매이게 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용기’있고 당당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실하신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반면 악마는 속이는 자고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둠과 손을 잡은 이들은 ‘두려움’이 점점 커져갑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영혼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넣을 수 있는 분을 합당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의 덕입니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그분을 향한 두려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지요.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악마의 먹이가 됩니다. 악마는 하느님의 자녀에게 어떤 짓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모셔져 있는 성령을 꺼낼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성령을 내쫓으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어둠의 영이 스며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은 어둠의 영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점을 보고 사주를 보는 것, 타로 카드와 같은 것이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연한 두려움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데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제한합니다. 누구를 만나면 안된다는 둥, 어느 방향을 조심해야 한다는 둥의 허튼 소리를 듣다보면 일종의 ‘두려움’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그런 것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이들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변명은 ‘재미로’라는 것이지만 결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인들 스스로 알고 있지요. 뭔가 은근히 거기에서 바라는 것이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했다면 매를 맞아도 덜 맞겠지만 위의 사항을 잘 알고도 다가선다면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양심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허튼 곳에 매이게 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