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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영혼의 나병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아주 당연히 원래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선물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지닌 것,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사실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없는 것, 내가 욕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서 항상 불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그런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을 통해서 항상 감사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당연한 것인양 여기고 거기서 더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는 신앙생활을 하느님에게 내어놓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라도 되는 양 간주하고 하느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욕구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 즉 구원을, 다른 말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해 주시려고 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현세적인 안락과 안녕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영혼의 나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갔던 나병환자들은 모두 육체의 나병을 지녔었지만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영혼의 나병, 즉 캐캐묵은 인간의 교만은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해방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낫자마자 예전의 것들을 탐닉하러 돌아갔을 것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격의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의 내면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서 예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구원을 얻기는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저 그분을 '안다'고 하면 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분을 알까요?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다채로운 차원을 다룹니다. 우리는 숫자를 알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아는 것이지만 그 안다는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숫자를 아는 것, 정보를 아는 것, 새로운 소식을 듣고 아는 것은 모두 피상적인 앎입니다. 그것은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기억이 필요할 뿐입니다. 듣고 외워두면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를 피상적으로만 안다는 의미로 쓰면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한 앎은 친교가 필수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그냥 유명 연예인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 사람이 기억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그 사람을 올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구원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까? 정보로는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분과 친합니까? 우리는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저를 4년 동안이나 지켜봐 왔으니 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모릅니다. 제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복음의 열정을 나눌 사람을 골라야 할 때에 누구를 고를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그런 열정을 나눌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막걸리를 같이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누구를 부를지, 이 동네에 유력 인사를 소개받으려면 누구를 찾아갈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것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영적 친구를 찾으라면 누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분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의도하고 어떤 길을 걷고자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고 그 길을 ...

교만

나아만은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그 교만을 낮추고 예언자의 명을 따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세례의 표상이기도 하고 현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칠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며, 교회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생명이 흐르는 강에 몸을 담그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즉시 그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올바로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씻기면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주인이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기성 신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과 마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끗해지지 못하며 늘 걸었던 걸음을 다시 되돌아오고 또 걸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는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기성 신자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인원 수나 늘려서 자신의 생활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 구상이나 하는 가운데 참으로 변화된 이들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적 결실을 늘려 나갑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애초에 나아만은 그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 가장 큰 문제였고 나아만이 주는 선물을 받을 경우, 마치 나아만은 스스로 자신의 치유를 '구입'했다고 느낄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일부러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열왕기의 구절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지는 욕심이 났고 그에게 가서 선물을 받아옵니다. 그러자 지금껏 나아만이 지고 있던 그 병이 게하지에게 옮아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위신이 중요하고 돌고 도는 돈이 중요한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헌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추석이라는 기간 동안 한 부부가 싸우고 다시 화해했다고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런 일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유산 문제로 형제들이 모여 한바탕 굿을 벌이고 결국 다들 사는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돌아가는 걸 자녀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예언자는 어떨까요? 정신나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선이라는 가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정반대로 더러운 영의 활동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더러운 영의 활동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더러운 영은 거룩함을 앞에 두고 버티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에 그 텅 빈 영혼의 공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신경써야 합니다. 더러운 영을 치우기만 하고 그곳을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으면 전에 있던 더러운 영이 다시 돌아오고 거기에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얼마 전에 신자가 아닌 분이 헛것을 본다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비슷한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그걸 알아들을까요? 그들은 당장의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불편만을 없애기를 원하지 거기에 새로운 주인을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제가 자기 집까지 찾아가주고 축복을 기원해 주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멈춰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의 끝은 이전보다 더 비참해 집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서야 영적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더 지독한 것은 그것을 메꿀 충분한 기회가 ...

믿음

복음이 설명하는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몸을 떠올려야 합니다. 먼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은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가장 작은 지체라도 그 지체의 끝단에서 느끼는 고통에 나의 모든 존재가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붙어 있으면 하느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돌보십니다. 다음으로 쓸모없는 종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언제 우리에게 반기를 든 적이 있습니까? 가장 힘든 일, 가장 더러운 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의 몸이고 그 다음 일을 바로 하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지체입니다.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순명이며 이런 순명을 한다고 해서 다른 특별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으로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지체가 됩니다. 사도들의 오류는 '믿음'을 무언가 마치 자신들에게 더해지는 것인 양 착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돈을 다루듯이 예수님에게 믿음이 100 정도 있고 우리가 10이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5를 주면 우리가 15가 되고 예수님이 95가 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에게 믿음이 100이 있을 때에 내가 아무것도 없더라도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그분의 100의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에게 순명하기보다 내가 중심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한번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바로 이해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추석 덕담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지시하는 것을 모아 보겠습니다. 1. 하느님의 은사(하느님의 선물)을 다시 불태우라. 2. 부끄러워 말고 주님을 위해 증언하라. 3.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 4.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라. 5.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을 지키라. 우리에게는 훌륭한 기회가 있습니다. 이번 추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자녀가 냉담하고 있는 집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가장 사랑해야 마땅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영혼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하게 몸을 돌본다 해도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의미 없습니다. 먼저는 그들을 힘껏 사랑하십시오. 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한 외적인 돌봄에서 멈추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이끌어 가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지간에 모여서 돈문제로 다투지 말고 주님의 용기 안에서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나의 욕심을 내려 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신앙에 대한 증언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연히 나와 관련된 것을 자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내면에 심어둔 거룩한 것이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하는 말을 기꺼이 인내로이 경청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하느님께서 주신 이 거룩한 무기로 이번 추석에 우리 가족 안에 더러운 영이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세상에는 싸우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실 싸움은 싸움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폭탄이 먼저 준비되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터지는 것처럼 싸움도 싸울 내면의 자세가 먼저 준비되고 싸움 자체는 작은 불로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기성과 탐욕은 싸움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기성과 탐욕은 서로의 충돌을 자연스럽게 준비합니다. 세상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자신의 이기성과 탐욕을 키워 나가면서 세상에는 곳곳에 폭탄이 준비되는 셈입니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을 뿐, 언제라도 심지에 불을 당기기만 하면 터져버릴 심산입니다. 하바쿡 예언서의 예언자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불의로 가득하고 재난과 억압과 폭력, 시비와 싸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멀쩡하던 사람도 내면이 뒤틀리고 어지럽게 됩니다. 앞서 진정한 전쟁은 그 전쟁 자체보다도 이미 시작된 내면의 무질서가 원인인 것처럼 사실 오늘날의 모든 어지러움은 그 이전에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의 어지러움이며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정한 전쟁은 현실의 전쟁 이전에 영적 전쟁입니다. 이 영적인 어지러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세상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집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세속에 찌든 온갖 정신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폭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엉뚱한 도화선을 건들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묵묵히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