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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수난 죽음 부활의 증인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의 부탁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는 제자들, 즉 당대의 사도들에게만 선포된 내용이 아닙니다. 이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선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나약하고, 어찌 보면 여전히 세속성의 종이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저 습관처럼 고착된 신앙행위에 머물러 말씀을 전하는 데에 지극히 소극적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실패해 그들을 냉담 상태에 두고도 그들이 삼시 세끼 밥은 잘 먹고 있는 것에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배고픈 이를 돕겠다면서 햇반을 가져다 주면서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있는 아기를 말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차라리 햇반을 주는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철없는 아기가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을 막는 것이 더 큰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신앙인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없는 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지금껏 거쳐온 그 어떤 시대보다 먹고 살기 좋은 시절에 ‘신부님,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열매 맺지 않는 이들에게서 달란트를 빼앗아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긴 2000년 전에도 돼지를 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을 하고선 떠나는 예수님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밭에 뭍힌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보물을 그대로 두고 돌아와 가...

우리가 받게 될 영광

우리가 돈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이유는 돈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신앙에 시큰둥한 이유는 신앙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모습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 구절 한 번 들었다고 그것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 현실화 하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즉 세속의 가치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야 비로소 한 번 쯤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신앙인들은 모두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고 아직 신앙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들 앞에 이를 보여주면서 살아가라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신앙인들은 오히려 세속인들보다 더 세속적이고, 탐욕스럽고, 말하기 민망하기까지 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신앙의 행위 몇 가지를 어기지 않고 하고 있다고 여전히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속을 분이 아닙니다. 훗날 다시 오실 주님께서는 이 흐릿한 세상 속에 참된 신앙인을 분별하실 것이고 알곡은 거두어 곳간에 넣으시고 쭉쩡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어 태워 버리실 것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신앙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의 지친 발걸음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증인이 되기

무엇을 하기 위해서 신앙인이 되는 것일까요? 미사를 빠지지 않고 나오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기 위해서일까요? 신앙인으로서 여러가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핵심적인 요소 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핵심에서 자연스럽게 뻗어나오는 가지 같은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1.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2.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명령하신 것입니다. 1.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우리는 모두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세례 예식 속에는 크리스마 성유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을 드러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예식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의미는 우리의 내적 기준이 성령을 가장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즉 거룩한 영이자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분의 거룩한 의지가 우리의 가장 중심 의지를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욕구가 더는 자리하지 않고 거룩한 의지가 자리하게 됩니다. 2.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거룩한 의지가 우리의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요소로 자리잡게 됩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 됩니다. 식사를 한 끼 하더라도 차를 한 잔 마시더라도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기쁨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다시 올 것이며 우리의 심판의 근거는 얼마나 증인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달란트를 더 벌어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영혼들을 벌어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신앙을 한 번도 주변에 퍼뜨려 보지 못한 이는...

진리의 영

진리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사실’과 ‘진리’를 헷갈려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조금은 더 심도 있고 깊은 영역에 존재합니다. 마치 인간이 다차원의 존재인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으로 깊이를 더해갑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 사람의 외면에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는 데에 멈추어 버립니다. 인간의 외면에는 얼굴의 생김새, 옷매무새, 타고 다니는 차, 살고 있는 집과 같은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바탕으로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정해 버리고 맙니다. 즉, 돈 많고 깔끔하고 준수한 외모를 좋은 것으로 그렇지 않은 이를 반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좀 배운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갖추어진 것들을 바라봅니다. 소위 교양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들입니다. 어떤 학력을 갖추고 있는지, 말투는 곱상한지 아닌지, 심리적으로는 안정되어 있는지 어떤지와 같은 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흔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의 부모님들이 상대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이 가장 깊은 곳을 존중하기 때문에 모든 이를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혼입니다. 영혼은 두 가지 영역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하나는 더러운 영, 세속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와 진리라는 것은 이 영혼의 진리를 말합니다. 영혼이 진실된 이, 영혼이 하느님과의 연계 속에 있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나름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을 초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바로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에 새벽에 신 게 먹고 싶다고 해도 나가서 사오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의 의지를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평화'가 될 것입니다. 평화는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갖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을 구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영혼 깊은 곳에 평화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려 주시면서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제자들은 더욱더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천상의 도성 예루살렘

세상은 온갖 부귀 영화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거룩한 천상의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예루살렘에서 빛나는 것들은 영적인 보석들입니다. 곧 인내, 성실, 선의, 정결, 순명과 같은 수많은 덕들이 고유한 영적 보석을 형성합니다. 그곳에는 성벽과 성문이 있습니다. 이는 안에 있는 것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또 밖에 있는 샅된 것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이들이 바로 사도들이고 교회의 목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성문의 숫자는 열둘이고 성벽도 열두 초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12지파와 12사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도성 안에는 성전이 따로 없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어린양이 그 자체로 성전이 됩니다. 사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교회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과 친교를 이루는 이들이 바로 성전 그 자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곳에는 더이상 우리를 이끌어 줄 다른 빛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어린양이 우리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놀라고 정신이 어지러워지다

참된 신앙인들은 구원에 말 그대로 목매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판단의 중심에는 '구원'이 존재합니다. 즉 구원에 연계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내가 다루고 있는 일이 본질적인 것인지 아니면 피상적인 것인지를 판가름합니다. 반면 신앙인들은 구원이라는 주제로 인해서 쉽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웃어 넘길 일들을 신앙인들은 구원이라는 주제 안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또 바람직하지 못한 이들의 선동에 넘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건은 이를 말합니다. 유다에서 온 이들이 '할례의 의무와 구원'에 대해서 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말 그대로 놀라고 정신이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사람들 앞에 구원과 연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 놓으면서 사람들을 놀라고 어지럽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흔히 사제의 시선 밖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단 사목자의 시선 안에 들어오면 어두운 구석에 빛이 밝혀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들의 그릇된 의도는 퍼져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우리 본당에 엉뚱한 성물들을 퍼뜨리면서 자신이 믿는 교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보이는 신심 운동을 꾀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주임 사제에게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구세주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두 가지

1.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쫓아갑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쫓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것을 초월한 존재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진리와 선과 사랑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정말 진리를 사랑할까요?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내비치고 수치스러운 것은 애써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진리이신 분을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감추어진 곳에서 더 빛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허영심이 없기 때문에 잘한 것을 굳이 자랑할 필요가 없는 이들입니다. 오히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수많은 것을 숨겨 두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작은 선을 잔뜩 부풀려 자랑하고 정작 자신의 어두운 면모는 꽁꽁 숨기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을 사랑할까요? 선함의 의미를 올바로 알 때에 우리는 선을 쉽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분이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저마다 나뉘어져서 자신이 선이라고 우겨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를 철저히 파괴하려고 드는 세상입니다. 그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참된 선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 참된 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정의를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서로들 사랑하는 시늉을 합니다. 그래서 이 ...

영광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그가 의도한 배신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고 마치 기차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 이후의 사건이 줄줄이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영광'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져오고, 수난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끌어 올 것이며,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될 것이고 그들이 구원받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찬송은 아담의 '복된 탓'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구세주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죄를 지은 게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의 무수한 오류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재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재앙이 되는 죄의 결과가 있는가 하면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의 어둠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부활을 상기시켜 주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에 가 닿게 됩니다. 사랑은 오직 부활을 얻은 이들의 전유물입니다. 마치 과자 100봉지를 얻은 아이가 과자 한 조각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과자 한 봉지뿐이라면 과자 한 조각도 아까운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100봉지의 과자 정도면 한 조각 정도는 기쁘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의미의 사랑은 믿는 이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그 어떤 봉사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명이라는 과자 하나를 들고 아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은 단순히 성당을...

새로운 세상

세상 살이가 힘겨운 이유는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 뒤에는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고통은 결국 우리가 죽어간다는 표지가 됩니다. 멀쩡하고 건강한 몸보다는 병약하고 아픈 몸은 죽음에 더 가까운 몸입니다. 고통과 죽음, 그것이 이 지상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요소이고 우리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날마다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묵시록은 다른 관점을 펼쳐줍니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는 세상,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이 마음 속에 품고 살아야 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는 분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믿는 이는 이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도 죽음의 위협도 없는 세상입니다. 반면 믿지 못하는 이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속일 수 없는 징표로 드러납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사람의 내면에는 희망과 기쁨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들은 이 기쁨이 없어서 그 기쁨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찰나적인 쾌락은 허락해도 영원의 기쁨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사도들의 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최우선 과제는 선교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고 그 지역을 찾아갑니다. 이들은 건물을 짓거나 다른 인프라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선포이면서 동시에 믿음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 속에는 언제나 '환난'에 대한 언급이 존재합니다. 즉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이들은 환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이어받을 사람을 '원로'로 임명합니다. 그저 인사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사명이 우선이고 그 사명에 충실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일은 두 가지뿐입니다. 1.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해 주신 모든 일 2.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 사도들은 다른 일에는 크게 관심도 없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과 믿음의 전파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길

길이라는 것은 목적지에 가 닿는 여정을 보다 또렷하게 보여주고 또 쉽게 만들어 줍니다. 길이 없어도 어떻게든 갈 수는 있겠지만 많은 수고가 들 것입니다. 반면 이미 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아버지께 가 닿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면 가장 쉽고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길은 많습니다. 원하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 17,27) 그러나 다른 길이 하느님께 가 닿도록 도움을 주는지 방해를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연히 길이 나 있는 곳을 굳이 다른 어려운 방법으로 길을 내려고 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가 길입니다. 그분이 보여준 삶을 패턴화해서 길을 새로 찾아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그분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바로 길이 됩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그분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합니까? 축하합니다. 당신은 하느님께 인도되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하지 않습니까? 저런, 안타깝네요. 그럼 오늘부터라도 친해지도록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냐고요? 그건 다른 주제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어떻게 사귈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그냥 줄구장창 시간만 보낸다고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잠시 만나도 친구가 되는 이가 있고 오랫동안 함께 해도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비결은 여러분이 직접 찾아야 합니다. 도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결국 실천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발의 먼지를 털다

사도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 앞에서 발의 먼지를 털고 그들을 떠납니다. 이는 악인들 앞에서 그들에게 그 어떤 해로운 일도 끼치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경고장을 날리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지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가치의 물질이며 그걸 터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막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먼지이며 그들에게는 먼지가 어울리는 셈입니다. 나아가 의인들을 그 악인들의 영역에서 묻혀온 먼지조차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표징을 보이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정돈하고 최종적으로 단절하는 셈입니다. 악인들은 의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였더라면 이미 내면에서 악을 떨쳐 버렸을 것입니다. 사실 선과 악의 문제는 의지의 문제이고 악인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이 악인인 데에는 꾸준함이, 즉 고집이 있는 셈입니다. 악인은 스스로 꾸준히 악에 머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에게 전해지는 의인의 말은 사실 맞는 말이며 의로운 말이지만 받아들이기 싫은 말이 됩니다. 그 안에 진리가 없어서 못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상대를 증오해서 상대가 하는 모든 말을 배척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언뜻 굉장히 복잡한 사연들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시야에서는 뚜렷한 두 방향 뿐입니다. 하나는 당신에게 나아오려는 진리와 선과 사랑의 방향이고 그 외 모든 반대 방향입니다. 오늘도 똑같은 메세지가 선포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하십시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 은총의 힘으로 구원을 받고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혹시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선을 권할 뿐 강요하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책임은 이제 여러분의 몫이고 저는 발의 먼지를 털고 이곳을 떠납니다. 

빼앗길 수 없는 것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있고 빼앗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 적지 않은 것들은 모두 빼앗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화는 얼마든지 도둑이 들어와 훔쳐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가진 명예와 권력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은 요즘 나오는 뉴스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빼앗길 수 있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이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듯이 훗날 빼앗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스스로가 건네주지 않는 이상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선을 사랑하고 쫓아갈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양떼가 되고 이렇게 변모한 우리들의 영혼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들과 그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언제나 굶주려 있는 이리떼처럼 먹잇감을 노릴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흔히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악한 이들은 악한 이들과 맞서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선하고 순진하고 순수한 이들을 먹잇감으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악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고 여러가지 종류의 박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더욱 굳건히 서 있으면 있을수록 악은 더욱더 활개를 치고 우리 영혼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할 것입니다. 악의 근본 속에는 '시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때에 우리의 믿음을 더욱 올바로 부여잡을 수 있습니다. 시련이 있어야 믿음의 진실성이 드러나고, 시련 속에서 우리는 인내를 키우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이 작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

기쁨

복음을 전해받은 이들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쾌락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기쁨은 보다 내밀하고 영적인 것이며 구원의 확신에서 기인하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복음을 올바로 전해받은 이들은 바로 이 기쁨을 이미 누리고 살고 있으며 이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반면 세상은 쾌락을 뒤쫓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쾌락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들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뒤쫓다 보면 자연스레 영혼이 더욱 공허해지고 그 공허해진 영혼, 어두워진 영혼을 메꾸기 위해서 더욱더 쾌락적이고 찰나적인 요소를 찾게 됩니다. 마치 마약을 맛본 사람이 이전의 쾌락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 더 강한 마약을 찾아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의 대열에서 더욱 멀게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빵을 섭취한 효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합니다. 바로 배고프지 않다는 것이며 목마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고통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소될 때의 기쁨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혼도 배고플 수 있고 영혼도 목마를 수 있습니다. 영혼은 사랑에 배고프고 진리와 정의에 목마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바로 이를 채우는 사람입니다. 그저 미사에 와서 의미없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신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올바로 모셨는지 아닌지는 앞서 말한 기쁨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영역을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를 채운 이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의 확고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강조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일시적인 쾌락과는 다른 ...

먹을 줄도 모르면서

스테파노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귀의 할례'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유대인들은 모두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스테파노는 보다 내밀하고 영적인 의미로 '할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역부족입니다. 그들은 결국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를 죽여 버리지만 죽으면서까지도 스테파노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의 멀어버린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는 빵'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빵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애시당초 그들은 표징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표징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비록 그들이 알아듣지 않더라도 그 다음에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 알아듣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

예수님은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불러다가 세 번 물으십니다. 그렇게 세 번의 배신은 회복되어야 했고, 베드로는 바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명에 충실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신의 어린 양들을 돌보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어린양은 누구이며 그들을 돌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단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실질적인 양떼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양의 특성을 가진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목자 앞에 그 목자의 명령을 따르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양들은 그 특유의 성질로 언제나 목자를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양떼는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저 성당을 다니기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깊이 새기고 당신의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서 애쓰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양떼를 돌본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돌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양떼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양떼가 욕구하는 것과 양떼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제대로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이 이것이 필요하다고 세뇌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올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청할 수 있고 양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우리 안에 양들은 오직 하나 주님의 목소리를 원합니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에 위안을 얻고 그분의 목소리에서 힘을 얻습니다. 우리 성당에 많은 신자 분들이 주님의 목소리를 올바로 알아듣고 그 목소리를 주변에 전하는 분들이기를 바랍니다.

힘을 숨기다

옛날 동화나 영화 같은 걸 보면 임금이 힘을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그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런 모든 아이디어들의 본래적인 자리는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계십니다. 물론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여러 예술인들이 그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묘사하려고 각종 예술품을 만들어내었지만, 그런 것들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 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분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그분의 존재 가치를 낮잡아 봅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들은 훗날 모두 바로잡힐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임금으로 군림하실 것이고, 그분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온 이들 심지어 그분의 뜻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온 이들이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온 생을 바쳐 온 이들이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어떤 일이든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복잡성이 증가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단순했던 일이 나중에는 엄청 복잡한 일이 되어 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마음은 순수했고, 맑았으며 아주 작은 욕구의 충족에도 기뻐할 줄 알고 다른 욕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어른이 되어 가면서 우리의 욕구는 복잡하게 바뀌었고 이제 삼시 세끼 밥만 먹고 따뜻하게 잔다고 해서 안락한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흐름은 교회에도 이어져서 처음에는 굉장히 단순했던 신앙의 요소들이 나중에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 되곤 합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초전성당은 비교적 행사가 없고 조용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때가 되면 챙겨야 하는 것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는 부활 행사를 했고 오늘은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으며 며칠 뒤에는 사목 방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들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이었고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부활시키셨고 그분을 온 세상의 임금으로 삼으시어 그를 믿는 모든 이가 죄를 용서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증언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훗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식별받게 될 일은 이 증언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했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 외적인 요소를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허송세월하며 살아가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모쪼록 이번 한 주간 나는 내가 가진 신앙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잘 살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