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2025의 게시물 표시

미움 받을 용기

사람은 사실 사랑받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생존하는 것이 육체의 본능이라면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상은 다릅니다. 이 세상은 원죄 이후로 사람들의 죄와 어둠이 누적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도 쓰레기를 치울 필요가 없지만 쓰레기가 있는 곳에서는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우는 수고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 어떤 영적인 쓰레기도 없는 곳이기에 모두가 기쁘게 생활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다른 상황입니다. 이곳에는 영혼의 쓰레기가 존재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존재하고 악의와 격분, 증오와 원한이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명을 나누어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이 내어놓는 악의 결과물을 자신의 영혼 안에 담아 치워내는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를 치운다고 표현하면 참 좋은 일 같지만, 쓰레기를 치운다는 것은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과 활동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자연스레 그들의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받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무죄한 이들을 피해자로 삼고 또 의로운 이들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순둥한 사람,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악에 맞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모든 세대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언제나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고 나서야 그들의 무덤을 꾸미기 시작합...

일하기 싫어하는 자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뭔가 엄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시고 가만히 있지 말고 몸을 놀려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일에 매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달린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면 그 엔진의 힘이 무슨 소용이고 그 차의 온갖 성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비록 차는 보잘 것 없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게 도와주는 차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일에 대해서 올바른 묵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서 일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자기 양식을 버는 일'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사실 우리가 바치는 주임의 기도 안에서도 '양식'이 나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우리는 매번 기도합니다. 그 양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이 말하는 양식은 단순히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이 아니라 영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양식을 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그곳에 온 이들을 먹이기 위해 분주히 애쓰고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 발취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양식을 벌고 있는 이는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순간은 바로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양식을 버는 일이 됩니다. 비슷한 예로 성당에서 전화받는 이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급한 전화는 성당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무질서한 삶'이 됩니다. 세상에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없습니...

거만한 자들 / 악을 저지르는 자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이들입니다. 거만함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이 됩니다. 마치 비가 내리면 높은 곳을 피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거만함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모든 거룩한 은총의 선물들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또 자신의 외적 열성을 한껏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사람들에게 칭송을 얻고자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짓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는 악의 속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하다는 이들을 단죄하시고 반대로 어둠의 구렁에 빠져 있는 이들을 곧잘 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아닌 것을 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고 죄를 짓고 있는 이들을 세속적 칭송으로 꾸며주곤 합니다. 악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아무리 짐짓 거룩해 보인다 한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내면 속에 탐욕과 악의가 가득했지만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외적인 탈의 힘을 빌어 스스로 거룩한 사람인 양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물하고 그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는 일련의 일들 속에서 그들이 사실은 선을 추구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내던 여인은 아주 훌륭한 표본입니다. 그들은 선을 추구하던 이들이었고 결국 그 선을 선물받게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거만한 이들과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 즉 그들의 악의 근원이 되는 존재인 사탄도 함께 처단될 것이고 가지, 즉 그들에게서 뻗어나가는 악의 소산들도 모두 처분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

그들의 생각

  다음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생각의 단편입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당연히 바로 끌어내야지요. 그건 나의 이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화해의 제물로 소나 한마리 잡아다가 하느님 앞에 바치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일 것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저 환자를 형제라고 할 지 몰라도 나에게 저 환자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고 또 당신 예수라는 작자는 지금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밉보이고 있소.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의 양심을 찌른단 말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이요. 그뿐만이 아니라오. 가능한 기회만 있으면 당신의 약점을 파고들어 당신을 로마에 고발해서 로마의 권력으로 당신을 망가뜨리고 파괴시키고 싶소.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오. 우리는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 따위에는 관심없소. 우리는 당신 양이 아니니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느님이 좋소. 부자에게 축복을 주고 가진 부를 더욱 늘려주는 하느님이 좋단 말이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즐기는 사제들을 좋아하오. 우리가 주는 돈을 받으면서 싱글벙글하고 우리의 귀에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축복의 말을 던져주는 사제가 좋단 말이오. 당신이 하는 것처럼 아무것에도 기댈 곳 없는 고아와 과부, 불치병 환자를 돌보는 하느님 따위는 우리는 필요없소.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사실 돈이 하느님이오. 그래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생기면 그 즉시 반응하고 신경을 쓰지만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이 원하고 바라는 것 따위는 크게 관심 없소. 그러니 그만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 우리에게 모욕이 되는 말은 하루빨리 집어 치우시오.'

영혼의 나병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아주 당연히 원래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선물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지닌 것,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사실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없는 것, 내가 욕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서 항상 불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그런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을 통해서 항상 감사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당연한 것인양 여기고 거기서 더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는 신앙생활을 하느님에게 내어놓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라도 되는 양 간주하고 하느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욕구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 즉 구원을, 다른 말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해 주시려고 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현세적인 안락과 안녕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영혼의 나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갔던 나병환자들은 모두 육체의 나병을 지녔었지만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영혼의 나병, 즉 캐캐묵은 인간의 교만은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해방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낫자마자 예전의 것들을 탐닉하러 돌아갔을 것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격의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의 내면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서 예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구원을 얻기는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저 그분을 '안다'고 하면 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분을 알까요?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다채로운 차원을 다룹니다. 우리는 숫자를 알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아는 것이지만 그 안다는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숫자를 아는 것, 정보를 아는 것, 새로운 소식을 듣고 아는 것은 모두 피상적인 앎입니다. 그것은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기억이 필요할 뿐입니다. 듣고 외워두면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를 피상적으로만 안다는 의미로 쓰면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한 앎은 친교가 필수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그냥 유명 연예인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 사람이 기억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그 사람을 올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구원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까? 정보로는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분과 친합니까? 우리는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저를 4년 동안이나 지켜봐 왔으니 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모릅니다. 제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복음의 열정을 나눌 사람을 골라야 할 때에 누구를 고를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그런 열정을 나눌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막걸리를 같이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누구를 부를지, 이 동네에 유력 인사를 소개받으려면 누구를 찾아갈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것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영적 친구를 찾으라면 누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분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의도하고 어떤 길을 걷고자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고 그 길을 ...

교만

나아만은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그 교만을 낮추고 예언자의 명을 따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세례의 표상이기도 하고 현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칠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며, 교회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생명이 흐르는 강에 몸을 담그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즉시 그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올바로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씻기면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주인이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기성 신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과 마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끗해지지 못하며 늘 걸었던 걸음을 다시 되돌아오고 또 걸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는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기성 신자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인원 수나 늘려서 자신의 생활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 구상이나 하는 가운데 참으로 변화된 이들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적 결실을 늘려 나갑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애초에 나아만은 그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 가장 큰 문제였고 나아만이 주는 선물을 받을 경우, 마치 나아만은 스스로 자신의 치유를 '구입'했다고 느낄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일부러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열왕기의 구절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지는 욕심이 났고 그에게 가서 선물을 받아옵니다. 그러자 지금껏 나아만이 지고 있던 그 병이 게하지에게 옮아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위신이 중요하고 돌고 도는 돈이 중요한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헌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추석이라는 기간 동안 한 부부가 싸우고 다시 화해했다고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런 일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유산 문제로 형제들이 모여 한바탕 굿을 벌이고 결국 다들 사는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돌아가는 걸 자녀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예언자는 어떨까요? 정신나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선이라는 가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정반대로 더러운 영의 활동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더러운 영의 활동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더러운 영은 거룩함을 앞에 두고 버티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에 그 텅 빈 영혼의 공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신경써야 합니다. 더러운 영을 치우기만 하고 그곳을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으면 전에 있던 더러운 영이 다시 돌아오고 거기에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얼마 전에 신자가 아닌 분이 헛것을 본다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비슷한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그걸 알아들을까요? 그들은 당장의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불편만을 없애기를 원하지 거기에 새로운 주인을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제가 자기 집까지 찾아가주고 축복을 기원해 주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멈춰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의 끝은 이전보다 더 비참해 집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서야 영적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더 지독한 것은 그것을 메꿀 충분한 기회가 ...

믿음

복음이 설명하는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몸을 떠올려야 합니다. 먼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은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가장 작은 지체라도 그 지체의 끝단에서 느끼는 고통에 나의 모든 존재가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붙어 있으면 하느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돌보십니다. 다음으로 쓸모없는 종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언제 우리에게 반기를 든 적이 있습니까? 가장 힘든 일, 가장 더러운 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의 몸이고 그 다음 일을 바로 하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지체입니다.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순명이며 이런 순명을 한다고 해서 다른 특별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으로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지체가 됩니다. 사도들의 오류는 '믿음'을 무언가 마치 자신들에게 더해지는 것인 양 착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돈을 다루듯이 예수님에게 믿음이 100 정도 있고 우리가 10이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5를 주면 우리가 15가 되고 예수님이 95가 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에게 믿음이 100이 있을 때에 내가 아무것도 없더라도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그분의 100의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에게 순명하기보다 내가 중심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한번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바로 이해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추석 덕담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지시하는 것을 모아 보겠습니다. 1. 하느님의 은사(하느님의 선물)을 다시 불태우라. 2. 부끄러워 말고 주님을 위해 증언하라. 3.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 4.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라. 5.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을 지키라. 우리에게는 훌륭한 기회가 있습니다. 이번 추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자녀가 냉담하고 있는 집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가장 사랑해야 마땅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영혼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하게 몸을 돌본다 해도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의미 없습니다. 먼저는 그들을 힘껏 사랑하십시오. 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한 외적인 돌봄에서 멈추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이끌어 가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지간에 모여서 돈문제로 다투지 말고 주님의 용기 안에서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나의 욕심을 내려 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신앙에 대한 증언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연히 나와 관련된 것을 자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내면에 심어둔 거룩한 것이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하는 말을 기꺼이 인내로이 경청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하느님께서 주신 이 거룩한 무기로 이번 추석에 우리 가족 안에 더러운 영이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세상에는 싸우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실 싸움은 싸움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폭탄이 먼저 준비되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터지는 것처럼 싸움도 싸울 내면의 자세가 먼저 준비되고 싸움 자체는 작은 불로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기성과 탐욕은 싸움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기성과 탐욕은 서로의 충돌을 자연스럽게 준비합니다. 세상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자신의 이기성과 탐욕을 키워 나가면서 세상에는 곳곳에 폭탄이 준비되는 셈입니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을 뿐, 언제라도 심지에 불을 당기기만 하면 터져버릴 심산입니다. 하바쿡 예언서의 예언자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불의로 가득하고 재난과 억압과 폭력, 시비와 싸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멀쩡하던 사람도 내면이 뒤틀리고 어지럽게 됩니다. 앞서 진정한 전쟁은 그 전쟁 자체보다도 이미 시작된 내면의 무질서가 원인인 것처럼 사실 오늘날의 모든 어지러움은 그 이전에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의 어지러움이며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정한 전쟁은 현실의 전쟁 이전에 영적 전쟁입니다. 이 영적인 어지러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세상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집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세속에 찌든 온갖 정신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폭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엉뚱한 도화선을 건들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묵묵히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고집

믿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번다면 돈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통해서 오고 내 손 안에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믿음이 없던 무신론자 집안에서 사제가 탄생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자녀대부터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라고 불립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언뜻 보기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자체 안에 그 믿음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 우리의 육은 관찰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의 활동을 통해서 영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악한 행동을 합니다. 반면 선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선한 행동을 합니다. 믿음 안에서 다루는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에 따라서 처분을 받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믿는 이들의 상급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뒤따르는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육체적인 영역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남은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뿐이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적인 삶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잃을 수 없고 오직 '거래'를 통해서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 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도 봉사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만일 봉사를 한다면 뭔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있기에 할 뿐입니다. 절대로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 속에서 보다 큰 세상을 살아갑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

믿음을 위하여 싸우라

성경은 믿음을 위해서 '싸우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삶에서 믿음은 그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원리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영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올바른 신앙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선물'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모든 은총은 그 자체로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지켜내야 하고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의 영향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은 더욱더 그 농도를 더해가고 있고 세속성의 공격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멍청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줄 듯이 상상하면서 믿음의 생활, 희생의 생활,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생활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심지어는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언뜻 외부적으로는 신앙에 열성인 것 같지만 신앙과 현실이 충돌하는 영역에서 언제나 현실에 양보를 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늘 전투에서 지는 셈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그런 상황이 다가왔을 때에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자녀들이 성당에 가기 싫다고 할 때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술자리의 친구들 사이에서 내 신앙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야 할 때에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주님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고 할까...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저 나름의 걱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걱정은 '영적인 상태에 대한 염려'를 말합니다. 세속에 속한 이들은 모든 걱정을 하지만 단 하나 영혼의 처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시온에 살면서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지어 성당을 다닌다면서도 스스로의 영혼의 처지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상아 침상과 안락의자가 뜻하는 것은 세속의 쾌락을 의미합니다. 영혼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안락', '안정', '세속적 평화’뿐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더 많은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면서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도취되게 됩니다. 어린 양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표상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기도합니다. 어린양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선하고 착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곧잘 세속 사람들에게 희생양이 되기 마련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락과 편의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이 일상입니다. 노래와 악기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드리는 헛된 경신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신앙인을 흉내내어 마치 거룩한 찬가라도 올리듯이 미사를 드리고 성사도 받지만, 실상 그들은 그들의 쾌락에 취해 도리어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정치인이 선거 때가 되면 미사에 나와서 거짓 신자 흉내를 내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또 자신의 본질의 삶은 하느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향유는 세속의 사치와 쾌락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의 욕구에...

원로,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 -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는 이들 수석 사제들 -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 율법 학자들 - 교만과 자기애에 사로잡힌 이들 언뜻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좋은 평판을 지니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좋은 명예를 지키는 것은 훌륭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공동체적인 악을 형성하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악에 저항하지 않고 함께 휩쓸려 가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모두 절제없는 음주라는 악습에 시달릴 때에 그 친구들과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도 술이라는 악습에 빠져드는 식입니다.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참된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오류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권력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국가 기관의 권력자들에게 기본적으로는 순명해야 하고 교회의 권력자에게도 순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참된 권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즉 봉사하는 직분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고 이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가 욕구하는 대로 부리고자 할 때에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런 이들은 참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력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경은 항상 하느님의 율법을 올바로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법의 올바른 정신을 알아 그것을 지키는 것과 법 그 자체의 지적 우위성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려고 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상징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교만에 빠져들고 그 교만을 바탕으로 자기 스스로의 욕구대로 남을 억누르는 데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의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같은 운명...

마귀는 사제를 공격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1. 마귀를 쫓아냄 2. 질병을 치유함 이 두 가지의 힘과 권한이 선물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과 권한은 오늘날의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주어집니다. 사제들은 공인받은 수단을 통해서 이 힘과 권한을 발휘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고해성사이고 병자성사입니다. 사제들은 성사 안에서 사람들에게 마귀를 쫓아내 줄 수 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제는 공인받은 영역 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서도 이 힘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이를 준성사라고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청하는 안수가 효과를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 평화를 회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집전자의 의지와 수용자의 의지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그저 좋은 거니 받아보자는 식이라면 아무리 진중하게 축복을 내리고 더러운 영에게 떠나라 명해도 그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대 세계에 마귀는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 고유한 영의 영역이 있고 마귀는 이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인데 그 영의 의도가 굉장히 사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인 거짓의 아비를 따라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아가 자신의 악한 의지를 선한 것인양 포장해서 퍼뜨립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본질적인 사명으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주었듯이 마귀가 하는 본질적인 사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에 있어서 이 마귀의 공격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사제직'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군대를 공격한다면 수많은 졸병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수많은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군을 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제는 영적인 장군의 역할을 차지합니다. 사제 한 명이 사라지면 그가 이룰 수 있는 수많은...

듣고 실행하기

첫째, 듣는가?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정보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 정보는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있고 우리가 찾아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듣는 것이 있고 듣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 올바로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1차원적으로는 당연히 성경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도 누군가가 올바로 풀어주지 않으면 엉뚱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성경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JMS는 성적인 타락을 창세기를 통해 정당화 하려고 하고 신천지는 묵시록을 핑계로 144000명을 모으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성경의 올바른 맥락을 이해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거룩함을 더해가도록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깨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혹자는 성경을 그저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성경 베껴쓰기를 여러 번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올바로 읽었다면 그런 자만이 오히려 자신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자신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 우리를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초대의 기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침묵'이 그 일을 하기도 합니다. 엉뚱한 친구들과 어울려 주변의 온갖 잡다하고 어두운 곳에 정신을 팔기보다는 차라리 고요함 중에 침묵하는 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절실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둘째, 실행하는가? 충분히 들었다면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석을 발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석을 세공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방향을 그저 아는 것으로 우리는 구원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아는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부끄러움

어린 시절 우리는 또래 집단에게서 제외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한때는 그 값비싼 패딩이 유행을 탄 것도 그것이 또래 집단에서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가 중요하고 그 친구에게서 배척당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딘가로 이사를 가면서 전에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너무나 쉽게 멀어지고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은 다들 한 번씩 하는 체험일 것입니다. 물론 시골 지역에서는 그럴 일이 잘 없기에 더욱 과거에 고착화 되기도 합니다. 즉, 여전히 사춘기 시절의 집착을 안고 사는 어른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흘러가고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전에 소중하다고 여겼던 가치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지나가게 됩니다. 지금도 삐삐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소중히 여겨지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기기들이 등장해서 그 자리를 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변치 않는 가치, 그 가치의 주인이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멀어질 수 있고 가치는 변하는 것이 되지만 오직 한 분 하느님에게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이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신앙 선조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니던 관직을 잃고 유배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들이 장사의 수단이 되니까 별의 별 공원을 다 만들어서 그들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현대에도 참된 신앙인은 존재하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천더기 취급을 받습니다. 이 재빠르고 똑똑하게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신앙인들은 뭔가 어리석어 보이고 허튼 짓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사라는 것을 제 잇속만 챙기고 최소한의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일 뿐, 성당에서 봉사를 왜 해야 하는지, 왜 엉뚱한 시간을 소비해야 하...

그 모든 것을 당하고도 이겨내리라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운명을 그려냅니다. 그들은 반대를 받고, 고발 당하고, 단죄 당하고, 환난, 역경, 박해를 겪고 때로 굶주리기도 하며 헐벗기도 할 것이고 위험과 칼이 들이닥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당하고도 이겨내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한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다가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약삭빠른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의로운 이들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는 하느님에게 바치지 않지만 다른 이의 자녀가 하느님에게 바쳐져 자신들을 위해서 신께 기도하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온전히 간수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더 늘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생명을 깎아서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하고자 애쓰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결과는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고 있고 그분을 믿기에 그분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보는 것을 일반적으로 '빛'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사실 빛은 보다 다채로운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매개체로 보았을 대에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성'도 빛이 됩니다. 이성은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전에는 모르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니까요. 마찬가지로 '신앙'도 빛이 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줍니다. 성경 안에서 나타나는 '빛'은 다름아닌 신앙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가장 밝은 광원이 되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분에게서 빛을 받게 됩니다. 1독서의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에서 우리는 앞서 말한 신앙의 참된 빛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 빛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빛에만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를 태양빛을 통해서 보지 않고 실내의 빛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본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을 그가 가진 재산과 학력으로 보고 그가 지닌 영혼의 빛으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가치 없는 사람에게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가치 있는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벌을 받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갈 때에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것을 빼앗기고 학대 당하고 박해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이제는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당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이 모두 끝났을 때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 나아간 이들의 뒤를 따라 찬란한 빛...

과연 얼마를 드려야 하느님께서 만족하실까?

우리는 거래를 할 때에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이득이 되고 상대도 만족할 만한 적정선을 찾고자 합니다. 동업하는 사람들끼리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눌지, 60대 40으로 나눌지, 유산을 나누는 형제들끼리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과연 하느님은 얼마에 만족하실까요? 무엇을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듯이 십일조라고 해서 10분의 1이면 될까요? 아니면 우리 천주교는 아무래도 더 야박하니까 30분의 1 정도로 퉁칠까요? 사람들은 사실 어마어마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과 우리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전권을 쥐고 계시고 우리는 그 피조물입니다. 무엇이 적정할까요? 답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럼 우리가 모두 봉쇄 수도원이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제나, 평신도냐, 수도자냐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성소의 차이일 뿐입니다.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생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것을 우리가 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집사처럼 애시당초 집사가 다루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집사의 것이 아닌 셈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생명, 내 가족, 내 재산, 내가 지닌 모든 사회적 지위와 명예, 권력 모조리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원래 모두 하느님의 것 가운데 일부를 위탁받아 쓰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마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하느님에게 줘서 그분을 일시적으로 만족하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원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느님은 훗날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 가실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내가 남겨놓은 것이 내 자식들 중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신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일, 당신이 바라시는 일을 모두 알려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입에 밥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뜻을 품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우리 신앙인들을 남겨두시는 이유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은 허울뿐인 말이 아닙니다. 이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나가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도 겨우 챙기는 수준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특히나 더 열심하다는 사람에게서 이런 특징은 쉽게 발견됩니다. 오히려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더 큰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합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만하는 이들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 됩니다. 하지만 넘치는 것, 혹은 넘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모자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에게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교만, 자만이라는 것은 스스로 필요를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자란 어른으로서 스스로 독립성을 키워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일 뿐입니다.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영원한 자녀이어야 마땅합니다. 헌데 이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자만하는 이들', '교만한 이들'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뚱아리를 건사해야 하고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화'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탐욕이 시작됩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를 손에 쥐어야 만족할까요? 때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나치게 욕심내는 이들의 씁쓸한 결말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성주가 참외로 한 해에 6000억을 벌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하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지키고 살았을까요? 잉여 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독한 약재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부수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적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생태적인 환경에서 자연은 '가난한 자들'이 아닐까요? 또한 무분별하게 벌어들인 돈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인...

군중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

군중은 필요를 찾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의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은 예수님을 가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이용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있던 '불편'을 없애주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나머지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그분의 나라가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셔야 하는 일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찾을 뿐이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어울리는 동안 한데 모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인간의 필요를 부수적인 요소로 봅니다. 그리고 핵심이고 본질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허락된 때가 지나고 나면 자신의 사명이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한 가지 재미난 장면은 예수님의 꾸짖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유하고 온화하고 정적인 분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이나믹 하신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정화 사건도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사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소리치는 것을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헌데 마귀들은 정작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소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도무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의도로 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마귀들은 아무리 거룩한 말이라도 더러운 목적으로 합니다. 심지어는 누구를 칭송하는 것 같더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거나 그가 하는 일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가 하는 일을 가로막고 방해...

낮에 속한 사람 /어둠에 속한 사람

오늘 독서와 복음 안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낮에 속한 사람, 빛의 자녀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을 본문에서만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은 요소를 들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 /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깨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영혼의 인지를 의미합니다. 육체로는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영혼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외적으로는 너무나도 바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활동 안에서 영혼이 깨어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절망하고, 탐욕을 부리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바쁩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어느 누구보다도 바쁘게 신앙을 꾸려 나가는 것 같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기도는 형식을 채우는 것뿐이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 역시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으며 항상 기쁘게 주님의 명령에 깨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가장 작은 일 안에서도 참된 신앙을 담아 보람을 찾고 주어지는 소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갑니다. 두 번째 특징은 서로를 신앙 안에서 챙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헛된 약속을 하고 자주 만나고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신경 쓰는 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들은 언뜻 서로를 챙기는 것처럼 보이며 서로의 만남의 시간을 더 자주 가지려고 하고 애써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안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흔히 세속의 주제로 가득 차 있고 하느님을 되새기거나 자신의 내면의 성장을 꾀하는 일은 없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누군가의 험담을 즐기고 모인 사람들끼리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흔히 다투고 싸우기가 일쑤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가능한 기회 속에서 서로 신앙의 여정을 챙기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되받다

부유한 이들에게 잘 해주면 그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으로 되갚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뇌물을 바치는 이들이 있고 권력가에게 알랑방구를 뀌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권력가를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위치가 뒤바뀔 때에 그들은 가차없이 냉혹하게 변해 버릴 것입니다. 이는 선거 전의 정치인과 선거 후의 정치인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현세에서 그 어떤 것도 보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되갚아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것들에는 욕심이 없지만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스럽지 않지만 진정한 것을 탐내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현세 생활에서 이를 적용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가난한 이들이 무턱대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참된 가난이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겸허한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가난한 이들 가운데 교만한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이용당해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영혼이 가난한 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영적인 재화를 나누어주는 것이 참된 나눔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

히브리서는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를 묘사합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이라는 미명 하에 선택된 이들, 구원받은 이들이 갈 곳을 묘사하고 그 전에 심판받은 이들이 가게 될 곳을 묘사합니다. 먼저 심판받은 이들이 갈 곳을 잘 살펴보면 그곳은 부정적이고 어둡고 나팔로 대변되는 불안이 가득하고 긴장감이 가득한 곳이며 그들을 인도하거나 위로해 줄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이는 영적인 이미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심한 괴로움에 싸여 있을 때에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영혼에 죄책감이 가득할 때에 그 영혼 자체는 불에 타오르는 듯이 괴롭고 길을 찾지 못해 짙은 어둠에 시달리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격한 폭풍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고발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고 그나마 우리가 들어야 하는 진리로 인도하는 말은 우리 스스로가 거부해서 그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양심이 어두울 때에 우리는 더욱 성경과 미사와 고해성사를 멀리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기회들을 거부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가는 곳은 말 그대로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수많은 천사와 구원받은 이들, 즉 내면이 온순하고 선하며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늘 주인으로 모시는 하느님께서 심판자로 계시고, 자신의 작은 오류가 모두 치유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 속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말을 물리치고 의인들은 격언을 신중히 되새길 뿐입니다.

비가 내리다

비는 하늘에서 골고루 떨어지지만 일단 땅에 닿고 나면 나아가는 방향은 뚜렷합니다. 비는 높은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비는 낮은 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모이고 모여 그곳에 고여 넓은 호수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은총을 쏟아부어 그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나약함이나 무능함이 아닙니다. 겸손은 그저 삼가기만 하고 착한 척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진정한 겸손은 당신이 시키는 일을 용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받고 그 소명을 적극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반면 교만, 거만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의지를 가장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귀는 순하지 않으며 이들은 진리를 들어도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이런 이들이 세상 안에서는 오히려 사랑받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람을 분류해서 이득이 될 만한 사람 앞에서 알랑방구를 뀌는 것을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뜻 외부에서 보면 그들이 잘 사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은 내면에 거만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은총을 배제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마치 비가 머무르기 위해서는 낮은 곳이 필요한데 이들의 영혼 속 자리는 높은 곳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은총을 자연스럽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영리함을 믿을 뿐 은총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결국 메말라가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는 영혼은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향유하더라도 결국에는 텅 빈 삶이 되고 맙니다.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격언을 되새기고 살아가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 늘 깨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 당신...

허영이 악의를 만날 때

우리는 '시너지'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두 개 이상의 것이 하나가 되어 독립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낼 때에 쓰는 말입니다. 헌데 이는 악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의도는 언제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악을 구체화 시켜줄 다른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다른 악을 지닌 이들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날 사기 사건이 많습니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기를 치려는 악한 의도를 지닌 이의 마음이 정당한 것 이상을 원하는 욕심이 있는 마음을 만나서 사기가 완성되는 셈입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오히려 남을 돕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사기에 연루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범죄에 연루되기는 힘듭니다. 공연히 술집이나 디스코텍 같은 곳에 가게 되면 범죄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헤로디아의 '살의'는 그 여성의 내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한 의도가 헤로데의 허영을 만나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헤로데는 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엉뚱한 약속을 했고 이는 결국 세례자 요한을 살해하는 데에 적극적인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구들을 올바로 성찰하지 않으면 악마는 그 작은 엇나감을 빌미로 우리를 구렁텅이에 넣어 버릴 수 있는 더러운 계획을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매들끼리 모여서 뒷담화를 하다가는 그 안에서 더 큰 악을 만날 뿐입니다. 형제들끼리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건강도 상하고 음주운전에 불륜과 같은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는 것이 일상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선이 은총을 만나 더 풍부한 선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고 그분의 은총을 목말라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덤을 만들고 묘를 꾸미다

죽은 것을 치장하고 그것으로 관광 상품을 만들어 냅니다. 그 자체가 그들, 즉 순교자와 예언자의 영성을 배우거나 살아있는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추종하는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더 큰 건물, 더 큰 성지를 조성하고 더 많은 부를 끌어들이고 그것을 유지해야 하는 환경은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행동 자체가 예언자들을 거부하고 죽이는 활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내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요.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사소한 손해조차도 견뎌내지 못하는 그들이 예언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화를 낼 지는 뻔한 일입니다. 현대의 교회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화려한 건물에 감탄하고 값비싼 프로젝트에 환호하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신심은 겉꾸며진 활동들로 바뀌어 버리고 거창한 일들을 치루어 내었으니 자신들은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부심을 가집니다. 단순히 성경을 많은 횟수로 읽어서 거룩해 질 것 같으면 성경을 교정한다고 수차례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아서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시골 촌로가 더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툭하면 박물관을 만들고 썩어 문드러질 것들을 집어 넣어 두고서는 마치 그것으로 당대에 살던 이들의 거룩함을 잡아 넣기라도 했다는 식의 태도가 바로 스스로가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사람들의 허영이 살아있는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증언하고 그런 허황된 이들의 손에 조용히 죽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 그들은 환호 속에 들여높여질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올바르지 않은 설교의 종류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설교 -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이들이 하는 설교입니다. 하느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린다거나 하느님을 만물에 통용되는 에너지와 같은 식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곡해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설교 - 언뜻 겉으로는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주로는 재화, 권력, 명예)을 가지고 하는 설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결국 더 많은 돈을 내게 만들거나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목적을 지니거나 권력층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하는 식입니다. 속임수로 하는 설교 - 삶의 진리를 가리고 사람들에게 헛된 환상을 심어주는 설교입니다. 지나치게 기적이나 이적 따위에 사로잡히게 해서 우리의 실존적 문제를 도외시하게 만들어 버리고 사람들을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게 만드는 설교입니다. 참된 설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는 강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강론입니다. 아첨을 하거나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을 찾지 않는 강론이어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하는 사목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목자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명령하고 밀어붙이는 식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목자는 사목 대상자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하며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고자 애를 써야 하고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도 바쳐야 합니다. 이런 사목자의 노력을 하느님은 아십니다. 올바른 사목자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겸손하게 처신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좁은 문

성경은 꾸준하게 신앙의 본질을 다루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꾸준하게 왜곡시키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사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구원이고 행복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에 어마어마한 조건을 붙이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면서 실상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들을 '불의를 일삼는 자들'로 규정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현실입니다. 과거부터 교회 안에는 자신이 정한 구원의 규정을 준수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러한 규정들이 보편화되어 본질을 상실한 교회가 되어 버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의로움'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의로움이 보다 참된 의로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몸을 해치고 있다면 더 큰 범주에서 그것은 나쁜 일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바라시는 것을 해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적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구원'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 질문을 하는 이가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구원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가 정해놓은 규정과 규범을 모조리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대답에 답변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만 좁을 뿐입니다. 그 문이 어디있는지 알고 그 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아는 ...

훈육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육체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구보하고 낮에 주특기 훈련을 빡세게 하고 틈만 나면 체력 보강을 위한 여러 작업을 시키면 됩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갈 때 쯤이면 군인은 제대를 합니다. 영혼은 어떻게 훈련시킬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하기 싫은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지만 커피를 싫어하는 이에게 커피를 마시게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세상에서 어떻게든 수많은 것을 얻고 누리기를 원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사랑하는 영원한 나라를 눈앞에 두고 어쩔 수 없이 견디고 버텨야 하는 공간이 세상이 됩니다. 미숙한 이들에게는 초보적인 훈육이, 고차원적인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훈육이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에게 우리를 내어맡길 때에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훈육을 선물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그분이 주시는 것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겸손한 순명입니다. 

살아남은 자들

이 짧은 표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는 살아남는 길이있고 살아남지 못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진영으로 병사들이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죽어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또 아직 돌아오지 않다가 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일찍 들어왔는데 죽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진영으로 들어오는지 아닌지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살아남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력은 무엇일까요? 이미 질문 안에 답이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력은 '믿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생명을 품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모두가 생명력, 즉 믿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아직 교회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생명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모든 살아남은 이들을 모으기를 바라십니다. 여전히 믿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을 모아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선교 위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가 어떤 가정을 언급하면서 한 번 가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분은 처음에는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집에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있어서 제가 찾아가 축복을 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문자가 왔습니다. 그 집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제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한계를 표현하고 그 뒤에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분들 안에는 생명력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생명력을 바탕으로 바깥으로 나가서 아직 하느님에 대해서 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훗날 당신의 뜻에 충실했던 이들을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

불타오르다

성경은 '불'이라는 상징을 자주 사용합니다. 불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그대로 태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이 태우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불은 종이나 나무는 태우지만 금속은 태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금속은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불은 둘 사이를 가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불순물을 태워 버리고 보다 순수한 귀금속을 더욱 깨끗하게 정련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당연히 영혼의 불입니다. 영혼의 불이 의미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영혼은 순수한 사랑을 만나면 더욱 불타오르지만 어떤 영혼은 순수한 사랑을 만나면 그것을 거부하고 외면합니다. 언뜻 듣기에 '사랑이면 다 좋은 것 아닌가? 그걸 왜 거부하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순수한 사랑을 즐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사랑을 추구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내가 자신이 허영과 탐욕에 사로잡혀 친구들 앞에서 자랑할 값비싼 핸드백을 사달라고 남편에게 떼를 쓰면 남편은 순수한 사랑으로 아내가 더 잘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하는 일은 우리 가정의 경제 사정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아내의 마음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남편을 증오하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일은 세상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갈라섬'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더러 서로 다투도록 종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 앞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 자녀들의 신앙 상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그 젊은 나이에도 신앙의 순수성을 굳게 쥐고 열심히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신앙을 던져 버리고 각자의 세속적인 삶에 열중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그 불이 한껏 타오르길 바랍니다.

죄에 맞서 싸우다

신앙생활은 쉽고 편한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죄에 맞서 싸우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영혼은 너무나도 쉽게 육체의 안녕에 굴복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안녕과 더불어서 영혼의 갈망 마저도 잠재우려는 힘에 쉽게 굴복당합니다. 그것을 유혹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를 견뎌내어야 하고 이겨내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유혹당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죄가 무엇인지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눈을 가리고 적과 싸우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싸우려는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디에다 칼을 휘둘러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대의 신앙 경향은 교묘하게 우리를 다시 과거의 율법주의로 끌어들이기 좋은 환경으로 이끌어갑니다. 법적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신앙생활, 기도의 횟수를 헤아려 그것을 늘려 나가면서 마치 스스로가 거룩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지하게 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우리를 엉뚱한 신앙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히려 내면의 교만이 성장하고 거룩하다고 하는 일들이 우리를 오히려 더 죄스런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희망을 가지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를 죽이는 이들, 예언자를 살리는 사람

예언자는 이상한 헛소리를 해 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몇몇 예언자들을 만나지만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직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언자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은 사실상 예언자인 셈입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두 가지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예언하는 입을 틀어막으려는 세력입니다. 술에 찌든 이들에게 '절제'를 가르치면 그들은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를 사회에서 축출하거나 가능하다면 죽여 없애 버리려고도 할 것입니다. 저마다의 죄가 큰 만큼 그 죄에서 돌이키려는 사람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죄가 없으면 선을 말하는 이의 말이 거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의 말은 거북하게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주변에는 언제나 예언자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예언자를 돕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언자의 말이 진실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들은 선과 악을 올바로 식별하고 있으며 악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표현할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언자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구원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이 예언자를 구속하는 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외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더러운 수렁에서 꺼내 주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워 주시고, 발...

더 나은 환경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환경을 꿈꾸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더 나은 환경이라는 것은 아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행복이 더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을 찾고 갈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갑니다. 여기에 전혀 엉뚱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여정에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목숨의 위협으로 다가올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것은 육신의 안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바오로 사도는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었고 저 역시 바오로 사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지만 저 역시 같은 고백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 삶의 모습에서 바오로 사도의 향기가 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가장 먼 곳도 달려갔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복음이 전해지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곳이라면 달려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세상 어디에도 딱히 속하지 않은 것에 참으로 만족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처럼 저는 예수님의 소유가 된 사람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머무르시지는 않은데 아직 저는 이 세상에 머물러 하느님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남아있는 과업을 다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본당 떠나시면 더 좋은 본당 가셔야지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좋은 본당이라는 표현이 세속적으로 좋은 본당이라면, 즉 쉽고 편하고 안락한 본당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앞으로 가는 본당은 더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더 복잡하고 골치아픈 사건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

수난 죽음 부활의 증인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의 부탁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는 제자들, 즉 당대의 사도들에게만 선포된 내용이 아닙니다. 이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선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나약하고, 어찌 보면 여전히 세속성의 종이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저 습관처럼 고착된 신앙행위에 머물러 말씀을 전하는 데에 지극히 소극적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실패해 그들을 냉담 상태에 두고도 그들이 삼시 세끼 밥은 잘 먹고 있는 것에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배고픈 이를 돕겠다면서 햇반을 가져다 주면서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있는 아기를 말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차라리 햇반을 주는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철없는 아기가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을 막는 것이 더 큰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신앙인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없는 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지금껏 거쳐온 그 어떤 시대보다 먹고 살기 좋은 시절에 ‘신부님,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열매 맺지 않는 이들에게서 달란트를 빼앗아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긴 2000년 전에도 돼지를 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을 하고선 떠나는 예수님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밭에 뭍힌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보물을 그대로 두고 돌아와 가...

우리가 받게 될 영광

우리가 돈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이유는 돈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신앙에 시큰둥한 이유는 신앙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모습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 구절 한 번 들었다고 그것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 현실화 하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즉 세속의 가치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야 비로소 한 번 쯤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신앙인들은 모두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고 아직 신앙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들 앞에 이를 보여주면서 살아가라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신앙인들은 오히려 세속인들보다 더 세속적이고, 탐욕스럽고, 말하기 민망하기까지 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신앙의 행위 몇 가지를 어기지 않고 하고 있다고 여전히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속을 분이 아닙니다. 훗날 다시 오실 주님께서는 이 흐릿한 세상 속에 참된 신앙인을 분별하실 것이고 알곡은 거두어 곳간에 넣으시고 쭉쩡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어 태워 버리실 것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신앙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의 지친 발걸음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