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모르는 게 아니다

  예비자 교리를 해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이 교리에 엄청 부담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거 몰라도 됩니다." 교리에 포함된 내용이라서 한 번 쯤 들어둘 필요는 있지만 사실 몰라도 되는 것들이 허다합니다. 그리고 듣는 순간 외에는 반드시 까먹을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이 강론을 들으시는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전례력이라던지, 제의 색깔의 의미라던지, 교회 내 여러 상징물들의 의미와 같은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알아두면 좋지만 모른다고 해서 구원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실 복잡다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고 아이들도 아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과연 이 질문에 여러분은 '모른다'고 답하실 것입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해 본다면 어떨까요?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무엇을 원할까요? 잡혀가서 자유를 상실한 이들은 무엇을 원할까요? 눈먼 이들은 무엇을 원할까요? 억압받는 이들은 무엇을 원할까요? 목마른 사람은 무엇을 원할까요? 외로운 사람은 무엇을 원할까요? 슬픈 사람은 무엇을 원할까요? 여러분은 모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갈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는 그것을 실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저는 남미에 있을 때에는 진정 배고픈 이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제가 부족해서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유로 바빴습니다.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해야 했고 돌아다니면서 사제가 부족한 영역을 나의 구체적인 활동으로 메꾸는 데에 바빴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사람들은 딱히 절실히 배고프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제가 넘쳐 흐릅니다. 반면 사람...

지체

단순하게 생각해서 하느님은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시니 모든 이들은 그분의 지체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맞습니다.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따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택에 의해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고 하느님께서 역겨워 하는 것을 역겨워 할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 아닌 것을 선택한 이들은 반대로 실행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그분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또한 당신의 성령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제 아무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홀히 여기고 성령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들은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같은 목적으로 움직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반대라면 하느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의 이기심을 따르고 살아가겠지요. 하느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지금까지 수십년간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 말씀 앞에 '그래서 어쩌라는 말입니까?'라는 의문이 든다면 스스로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할 바를 알고 있으며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저마다의 자리에서 이 말씀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기쁜 말씀

처음 준주성범을 만나던 날을 기억합니다.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날이 마주하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너무나 달아서 늘 그 말씀에 취해 있었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에는 팔공산의 한티 피정의 집에서 영성의 해를 보내고 있었는데 피정의 집 앞마당에 있는 잔디밭은 휘적 휘적 거닐면서 그 말씀을 묵상하던 기억이 납니다. 말씀이 달콤하다고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맑고 순수한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다가옵니다. 어쩌면 그때 받은 힘으로 지금껏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언뜻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기쁨들은 사실 속임수입니다. 결국 빼앗겨 버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마지막 날에 모두 상실하게 될 기쁨입니다. 그래서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이용하되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말씀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마치 운동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 운동을 실제로 하려면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실행한 운동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 안에 녹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세상이 끊임없이 공격해 들어오고 속이려고 드는 데도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에즈라 사제가 읽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고 참되어 어리석음을 깨우치며 당신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밝으니 눈을 맑게 해 줍니다. 그래서 백성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속이는 세상의 헛된 소식에 기뻐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실함...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예수님은 아직 기적을 시작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숨어 지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청을 드렸고 바로 그 청이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처럼 의로운 이의 갈망은 하느님의 때를 앞당길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특출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특출난 재주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누군가 그 재주를 필요로 해야 비로소 그 재주도 빛나는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전능도 그 전능이 드러나도록 갈망하는 이들로 인해서 빛을 발하는 셈입니다. 성모님께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모님의 내면 속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순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 한마디의 말로 잘 드러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제가 남미에서 선교를 할 때에 사람들은 사제의 말에 순명했습니다.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도 사제가 찾아가서 그만 화해하라고 하면 거룩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대로 순명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사람들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사제의 말보다는 점술가의 말에 더 의존하기도 하고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의 말을 사제의 말보다 더 신뢰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 어른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사제를 사랑했고 존경했으며 세상의 가치보다 신앙의 가치를 뒤쫓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삶은 오히려 더 단순했고 명료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명료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속이는 자들이 많이 나와서 이 말도 맞는 것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령은 한 목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에서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다양성 속의 일치

산길을 걸어보면 같은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완전히 똑같은 풀도 없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고유성을 지닙니다. 하느님은 다양성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은 아무런 질서 없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다양성에는 같은 목적이 존재하고 같은 방향이 존재합니다. 그 목적과 방향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한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없다고 태중의 아기를 죽여서도 안되고 그저 쾌락을 누리고 싶다고 마약이나 중독성 약물을 함부로 섭취해도 안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에 대해서 근거없는 비방을 해서도 안되고 험담이나 뒷담화를 해서도 안됩니다. 갖고 싶다고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자신에게 쓸어 담아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왜 안될까요? 모든 것이 목적 없이 창조 되었다면, 어디로 가든지 그게 나의 길이 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우리가 욕구하는 대로 하면 안되는 걸까요? 여기에 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다양성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영적인 질서 안에서도 다채로운 은사들을 선물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 분이신 성령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 모든 은사를 통해 공동선을 이루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 이끌어 가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반항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집단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이들은 언뜻 공동체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할 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드러내지 ...

그분을 기다리는 처녀들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와 그 여파로 시달려 왔습니다. 그들의 범죄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도리어 낙원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은 대를 이어오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원한 분에게 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것들이 신적인 능력이라도 되는 양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강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동의 없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 '순명'이 있었습니다. '네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성모님이십니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이사 62,3) 바로 이 성모님의 순응으로 인해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으로 제시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어떤 의지를 품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자세로 살아갈까요? 아니면 아직도 내가 추구하는 세상의 완성을 꿈꾸고 있을까요? 우리의 신랑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는 처녀들입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지만, 그분은 선한 분이시고 아름다운 분이시기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는 분명히 좋고 아름다운 것임을 믿음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맞닥뜨린 현실

동방박사들은 순진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자신들의 지성적 탐구로 별의 운행을 알아내게 되었고 그 별이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초기에는 누구나 순진한 마음입니다. 그저 성당에 가면 뭔가 좋은 것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 일당을 만납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방 박사들은 순진합니다. 반면 헤로데 일당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의 목적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 측은 경배를 하고 싶어하고 다른 한 측은 살인을 하고 싶어하고 거짓을 남발합니다.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서로 돕기까지 합니다. 이는 현재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이들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1도 없는 사람들도 함께 공존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참된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름 도움이 됩니다. 마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더 무거운 역기가 근육을 더 키워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순진했던 이들은 악한 의도를 가진 이들과 마주하면서 내면의 신앙을 더욱 다져 나가고 키워 나갑니다. 결국 동방박사들은 아기를 만납니다. 그리고 기쁨 가운데 경배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귀한 보물을 그 앞에 내어 바칩니다. 반면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게 될 것은 분노와 원한, 증오와 슬픔 뿐입니다. 이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날 분명한 영적 현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비

처음부터 모든 것이 알려질 수는 없습니다. 마치 대학 수업을 유치원생에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알아들을 만한 것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고 심도를 깊게 합니다. 예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선택된 이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선택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가지는 특권을 그들은 이해했습니다. 마치 복사서는 아이들이 사제 생활의 멋진 외적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다음 단계를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머지 않아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구원은 자신들이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도 빼앗기고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복사서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님이 된다는 것은 마냥 멋진 것이 아니라 삶에서 다가오는 여러가지 도전들에 적극적으로 응대할 때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학업에 있어서도 그렇고 교우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수년 간 거치고 통과해 내지 못하면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도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춰져 있던 신비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숨은 신비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만의 선별적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제가 된 이들도 똑같이 깨달아야 하는 바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특정 사람을 선별해서 허울 좋은 특권을 주기 위해서 사제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숨어 있던 신비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뿐입니...

우리의 영혼이 빛으로 감지하는 것

빛이라는 개념은 성경 안에서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각 대상에 따라서 빛이라는 주제는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태양빛을 압니다. 그 밝은 빛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감각됩니다. 우리의 지성도 빛을 감각합니다. 몰랐던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지성은 어두운 곳에 빛이 비치는 것처럼 밝아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빛은 바로 영혼의 빛입니다. 영혼은 언제 '밝음'을 인지할까요? 정답부터 말하자면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선물받을 때에 영혼은 밝아집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 빛 안에 이미 살아오기 때문에 빛을 알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를 체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라는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원래 맑고 밝기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죄를 짓고 나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영혼의 빛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즐거운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밝히는 빛으로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을 그저 한 때의 소비 상품으로 이용하는 자들에게 성탄은 일시적인 쾌감을 선물할 뿐이지만, 성탄의 참된 의미를 아는 이들에게 성탄은 꾸준한 내면의 기쁨으로 선물되는 것입니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고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 온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