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석사논문을 쓰면서 ‘놀이’에 대한 윤리신학적 비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놀이는 비생산적인 것이 놀이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무언가를 생산해 내지 않는 직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제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손에 쥐어지는 산물을 생산해 내지 않는다 하여 비생산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 꼬마 아이의 ‘감사합니다’라는 말보다는 누군가가 봉투라도 하나 들고 오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필요도 없는 그 봉투를 받아들고는 뭔가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에게 필요없는 그 봉투는 도리어 내면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이상의 것이 이유 없이 주어질 때에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내면을 파괴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물질은 늘 ‘집착’을 불러오고 무언가에 집착하는 마음은 늘 멍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도한 욕구로 인해서 필요없는 것을 쌓아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내면이 공허(방탕과 만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보니 공허한 근심거리가 자꾸 느는 것이지요.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