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복잡해지는 이유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그래 다른 데 가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 네.

기철이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찍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을 마음에 품고 말이지요. 학교를 마치고 일찍 들어왔습니다.

끝.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철이는 엄마의 부탁을 들었고, 그리고 그 부탁을 지키면서 상황은 종료된 셈입니다. 이번엔 다른 경우를 살펴봅시다.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그래 다른 데 가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 네.

혜숙이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찍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을 마음에 품고 말이지요. 쉬는 시간에 친구 미숙이가 다가옵니다.

- 얘, 오늘 우리 같이 노래방 가지 않을래?
- 안돼,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어.
- 얼마 안 걸릴거야. 그리고 옆 고등학교 선배들도 오기로 했단 말야. 네가 좋아하는 진우 선배도 올거라구.
- 응? 진우선배? 그 잘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장국영과 장동건을 반반씩 섞어놓은 그 선배 말야?(죄송합니다. 시대 착오적인 배우 선택과 저 자신의 이름을 남용한 것에 사과 드립니다. ㅋ)
- 그래 그 선배 말야. 너 전에 관심 있다고 했잖아.
- 흠… 그럼 잠깐만 다녀갈까?

하교 시간이 되어 혜숙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들어갑니다. 노래방에는 이미 옆 고등학교 선배들이 잔뜩 와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습니다. 혜숙이는 관심이 없는 척 진우 선배 건너편에 앉아서 노래방 기기 화면의 가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진우 선배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혜숙이는 그 모습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노래방 시간이 다 끝났는데도 혜숙이는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모임이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시계를 보았습니다. 이런,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하교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이 맘 속에에 아른 거리지만 눈 앞에 비쥬얼이 뛰어난 진우 선배를 향한 마음이 너무나 강해서 엄마 걱정은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혜숙이는 편의점에서 선배들과 간식을 사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걱정이 시작됩니다. ‘엄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할까?’ 하지만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혜숙이는 미숙이에게 전화를 겁니다.

- 너 오늘 말이다. 혹시 우리 엄마에게 전화오면 나 그날이라서 통증이 너무나 심해서 양호실에서 한참 쉬어야 했다고 하는거다?
- 뭐? 거짓말하려구?
- 어쨌든!! 알겠지?
- 그래 그래 알았어. 걱정마.

혜숙이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엄마가 벨소리를 듣고 쫓아나옵니다.

- 너 도대체 어디 갔었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혜숙이는 얼른 얼굴을 이그러뜨리고는 엄마에게 준비한 거짓말을 시작합니다.

- 엄마, 나 오늘 너무 아팠어. 미숙이가 나랑 같이 있어줬어. 지금까지 양호실에서 쉬다가 온 거야.
- 그래? 알겠다. 지금은 좀 괜찮니? 어여 들어와서 씻고 밥 먹자.
- 응, 엄마.

의외로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는 엄마를 보고 혜숙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혜숙이는 미숙이를 만나 어제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합니다. 헌데 미숙이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 너네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벌써 전화했었데.
- 뭐야?!!!!!!!
- 우리 엄마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으니까 상관없지만, 너 괜찮니?

혜숙이는 아차 싶었습니다. 엄마는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잠시 후 반장이 혜숙이를 부릅니다.

- 혜숙아 담임 선생님이 찾으셔.
- 응? 나? 왜?
- 몰라. 교무실로 오래.

혜숙이는 교무실에 갔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혜숙이를 불러다 앉히고는 차분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 이녀석, 어제 어딜 그렇게 쏘다닌거야? 어머니가 전화 오셨었어. 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방과 후에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드렸지. 다음부터는 꼭 집에 연락하고 다니거라 알겠니?
- 네.
- 근데 어제 너 도대체 어딜 갔던거냐?

혜숙이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눈물마저 글썽이는 걸 보고 담임 선생님은 놀라서 ‘너 왜그러니?’하고 묻지만 혜숙이의 입은 열리지 않고 그저 눈물만 또르르 흘릴 뿐이었습니다.

============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인간사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들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물론 그 덕에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게 단순히 소설과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면서 우리를 괴롭힌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삶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쉴 때 쉬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할 때에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인생은 늘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