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에서 쌓인 억울함을 모두 해소하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완벽하지 못하고 누구나 하나씩 부족함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서로들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런 부딪힘 속에서 작은 억울함들이 생겨나지요.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억울함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즉, 나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주변에서 뭔가를 잘못해서 생겨난 억울함이지요. 자연 재해로 인한 억울함도 있습니다. 농사를 실컷 지었는데 장마에 모두 쓸려가 버리곤 하는 일이 일어나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모든 억울함을 해소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함은 오직 ‘영원’ 안에서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가 너무나 짧아서 그 억울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했던 분, 예수님입니다. 아마도 억울함으로 치면 짱 먹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셔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잔뜩 가르쳤더니 그 보답으로 수난과 죽음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그분이 시작한 일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사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는 거의 실패한 모양새나 다름 없었습니다. 비록 부활하시고 교회가 생겨났지만 그 교회는 지금까지도 비틀비틀거립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지요.
억울함이 진정으로 해소되는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억울함이 진정으로 해소되는 곳은 영원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억울함을 ‘견딜’ 수 있습니다. 억울함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지닌 믿음과 희망이 좋은 것이지요. 억울함은 분명히 해소됩니다. 다만 그 시간이 좀 많이 길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영원 안에서의 그분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부릅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억울함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즉, 나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주변에서 뭔가를 잘못해서 생겨난 억울함이지요. 자연 재해로 인한 억울함도 있습니다. 농사를 실컷 지었는데 장마에 모두 쓸려가 버리곤 하는 일이 일어나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모든 억울함을 해소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함은 오직 ‘영원’ 안에서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가 너무나 짧아서 그 억울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했던 분, 예수님입니다. 아마도 억울함으로 치면 짱 먹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셔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잔뜩 가르쳤더니 그 보답으로 수난과 죽음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그분이 시작한 일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사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는 거의 실패한 모양새나 다름 없었습니다. 비록 부활하시고 교회가 생겨났지만 그 교회는 지금까지도 비틀비틀거립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지요.
억울함이 진정으로 해소되는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억울함이 진정으로 해소되는 곳은 영원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억울함을 ‘견딜’ 수 있습니다. 억울함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지닌 믿음과 희망이 좋은 것이지요. 억울함은 분명히 해소됩니다. 다만 그 시간이 좀 많이 길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영원 안에서의 그분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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