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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중요한 선택

사과 먹을래 오렌지 먹을래?

이 질문은 뭘 선택해도 상관이 없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질문은 다릅니다.

먹을래 굶을래?

우리 인생에서는 다양한 것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지의 것들이 있고, 다른 한 편,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옵션이 있는 걸 선택하는 데에 굉장히 신중하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반대로 반드시 선택해야 할 것에는 소홀하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세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자녀들은 때로 빛의 자녀들보다 더욱 영리하게 세상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은 가만히 두어도 절로 해결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인간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극단의 상황에서 그 어떤 선택이라도 하게 마련입니다.

현대의 위험은 인간들에게서 내면의 삶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외적인 화려함과 첨단 과학 기술들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외면의 가치들을 들어높이고 그것에 집중하는 한편, 반대로 내면으로는 더욱더 빈약해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옵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옵션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걸 들어 볼까요?

창조주를 믿어야 할까요?

이 또한 수많은 이들 앞에서는 그저 옵션의 하나인 질문일 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스스로를 신의 영역에까지 끌어 높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생명연장의 기술과 우주과학으로 마치 스스로 신이라도 되는 듯이 간주하고 있지만 인간 생명만큼 하찮은 생존능력을 가진 존재도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히려 야생의 생물들이 인간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여러가지 난제들, 하루를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과 결정들을 다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릇되이 선택해서는 안될 것들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루이비X이냐 샤X이냐 하는 것은 옵션일 뿐입니다. 그냥 동대문 시장에 가서 아무 백이나 사도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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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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