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다행히 장님이 없습니다. 장님이라면 지금 이 글을 읽지도 못할 테니까요. 우리는 모두 장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단순히 장님 치유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도 지나가다가 심심해서 그 장님을 택해서 치유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눈 먼 이들이 다시 보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이 사명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얼마나 보고 있을까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선율에서 기쁨을 느끼시는지요? 아니면 새장 안에 갇힌 새의 비탄과 절규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 새의 화려한 모양새가 마냥 마음에 드실 뿐이신가요?
자녀와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언제인가요? 자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허가 보이시는가요? 아니면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자녀를 주변에 온통 자랑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신가요? 그 성적을 받아오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자녀의 외로움과 삶의 무게가 보이시나요?
길가다 피어있는 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시나요? 그 꽃 마저도 입히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탄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여전히 백화점 쇼윈도에 더 눈길이 가고 그 가격표에 따라서 그 화려함이 두배 세배로 더욱 도드라져 보이시는가요? 할아버지의 순박한 미소의 편안함보다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돌들이 섹시함을 뽑내는 의상이 더 즐거우신가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잘 보고 있습니다. 똑똑히 보고 있지요. 우리의 두 눈은 아주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열려 있는 걸 열려고 하신 게 아닙니다. 닫혀 있는 무언가를 열려고 했지요. 우리의 닫혀진 부분, 우리의 내면의 닫혀진 영혼을 열고자 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 본보기로 장님을 치유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하신 ‘신기한 기적’만 보일 뿐, 그분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무언가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지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성경이 단순히 장님 치유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도 지나가다가 심심해서 그 장님을 택해서 치유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눈 먼 이들이 다시 보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이 사명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얼마나 보고 있을까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선율에서 기쁨을 느끼시는지요? 아니면 새장 안에 갇힌 새의 비탄과 절규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 새의 화려한 모양새가 마냥 마음에 드실 뿐이신가요?
자녀와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언제인가요? 자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허가 보이시는가요? 아니면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자녀를 주변에 온통 자랑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신가요? 그 성적을 받아오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자녀의 외로움과 삶의 무게가 보이시나요?
길가다 피어있는 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시나요? 그 꽃 마저도 입히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탄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여전히 백화점 쇼윈도에 더 눈길이 가고 그 가격표에 따라서 그 화려함이 두배 세배로 더욱 도드라져 보이시는가요? 할아버지의 순박한 미소의 편안함보다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돌들이 섹시함을 뽑내는 의상이 더 즐거우신가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잘 보고 있습니다. 똑똑히 보고 있지요. 우리의 두 눈은 아주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열려 있는 걸 열려고 하신 게 아닙니다. 닫혀 있는 무언가를 열려고 했지요. 우리의 닫혀진 부분, 우리의 내면의 닫혀진 영혼을 열고자 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 본보기로 장님을 치유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하신 ‘신기한 기적’만 보일 뿐, 그분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무언가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지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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